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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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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런 책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마도 젊을 때는 죽음이란 게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지금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어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싶습니다. 오늘이 내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갖게 해주는 책의 감상문을 소개합니다.


지은이: 샐리 티스데일


  작가는 완화의료 분야에서 오랫동안 종사하고 있는 현직 간호사인 샐리 티스데일입니다. 직업은 간호사지만 다양한 작품을 저술했고, 여러 문학상 수상자 경력이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임종을 곁에서 지켜봤고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죽음에 대해 실질적인 조언을 이 책을 통해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을 것이고 그것은 본인이 됐던 가까운 지인이 됐던간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 보호자, 법적대리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자세 등에 대해 냉정하고 자세하게 조언하고 있습니다.


  작가 자신도 이 책에서 절친한 친구인 캐롤, 스테파니, 마크 버치와 종교적 정신적인 친구 교겐 그리고 어머니의 임종을 보면서 더욱 더 독자로 하여금 공감하게 합니다. 모두들 갑자기 찾아든 불치병과 사고로 현세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안타까운 마음도 표현되어 있어 죽음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고 언제든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책 내용 감상

 

  "사기그릇은 언젠가 깨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사기그릇의 생명력은 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위태로운 아름다움. 우리의 고충이 여기에 잇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과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산다.우리는 갖가지 재료로 화려하게 만든 조화보다 시들어버리는 생화를 좋아하고, 금세 떨어져 발길에 차이고 말 단풍을 일부러 찾아가 구경하며, 산기슭 너머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넋 놓고 바라본다. 금세 사리지고 말 취약성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14p)

  작가의 지인인 불교의 스승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대하여 두려움이 아닌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는 훌륭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과 사라짐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동서양의 공통적인 깨달음입니다. 짧은 구절이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시간 속에서도, 아침 해가 뜨고 바쁜 하루를 보내며 떨어지는 태양을 보면서도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서는 막연히 죽음이 두렵고, 젊어서는 나에게는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서 선뜻 와 닿지 않고,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은퇴시기가 다가오면 죽음이 나에게도 멀지 않은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위와 같은 말이 더 이상 막연한 두려움이나 와닿지 않는 남의 일이 아닌 세상 속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어떤 작가님들은 나이가 먹어도 더 품위 있게 늙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죽어감에 있어서도 덕을 쌓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도 삶을 품위있게 마무리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것은 같은 시간을 보내고 같은 삶을 살아도 매사를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평소 태도와 사고방식이 우리를 이끈다.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과 대면하고 싶다. 당신은 어떤가? 헌신과 사랑과 모험심 속에서 죽음을 만나고 싶은가. 아니면 꺼져가는 불빛에 대고 분노를 표현하고 싶은가? 지금부터 그러한 자질을 기르고 익히도록 하라. 그러한 자질이 몸에 배면 정신이 나가더라도 그대로 행동할 수 있다. 습관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다. 나는 낯선 환경에 처하거나 몹시 두려운 상황에서도 호기심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나는 뒤에서 버스가 덮치는 상황을 떠올린다. 그나저나 운석은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엔 제약이 없다 온갖 두려운 상황에서 호기심을 발휘하면 내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호기심이 발동할 것이다.(85p)

  다소 재미있는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위기나 죽음 앞에서 호기심을 생각한다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역발상이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수없이 지켜 본 작가는 죽음 자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인 훈련이 되어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작가님이 말하는 습관으로 말입니다.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면 그 심리상태를 주변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갑자기 사고를 당한 동료를 위로를 해도 왜 분노하는지 왜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지를 모르겠지요. 하지만 병원에서 수많은 환자를 겪어본 의료 관계자들은 환자들의 심지적인 패닉 상태를 쉽게 파악하는 것을 나 자신도 보았습니다. 다만 작가님이나 의료 관계자들처럼 직업적으로 훈련이 되어 있거나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한 패닉 상태를 이겨내기가 쉽지는 않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의 전환이나 자질을 스스로가 길러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환자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 중에 하나가 바로 가족들이 자기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죽음을 앞둔 환자본인이 정신적으로 긍정적이어야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 지인들도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겨내기가 쉬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좋은 죽음과 관련된 대다수 정의에 의하면, 페리의 죽음은 좋은 죽음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줄곧 극심한 통증과 회한에 잠겨 있었으니 말이다. 의료진과 사회복지사 할 것 없이 그 모습을 지며보던 사람도 모두 괴로워했다. 페리는 자율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선의로 제공하는 치료마저 거부했다. 나는 페리가 죽음에 맞서 싸울 힘이 없음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알리려 했다고 생각한다. 페리는 몸을 이루는 원자가 다 소멸할 만큼 무기력한 상황에서 죽음에 순응하고 싶었던 것이다 죽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할 게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계획과 지원과 사전 연명으로 의향서가 당신에게 통제력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동물이고, 우리 몸은 기능을 상실한다. 우리는 죽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틸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 페리는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을 '자주적 죽음, 명백한 죽음'이라고 부른다. 좋은 죽음인 것이다.(93p)

  이 분분은 내 생각엔 반론을 하고 싶습니다. 위에 설명된 페리는 가족도 친척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주적인 죽음, 명백한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또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불치병이 아니고 한번의 치료로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의학적인 치료도 해봐야 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환자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소중한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쉽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인생과 가족에 대한 무책임으로 보여집니다. 불교를 가지고 있는 깊은 신앙심이 있는 교겐 역시 마찬가지구요.

  얼마 전에 읽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도 알리사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양원으로 도망치듯 들어가서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차피 죽음이라는 것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념으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리고 가족구성원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최선의 인생을 살고 치료 가능한 질병이면 치료를 하고 끝까지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도 '자주적인 죽음, 명백한 죽음'만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자주적인 죽음이나 명백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죽음이 아닐까요?

 

  한 사람의 죽음으로 가정이 파괴될 수 있다.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며, 남겨진 가족들이 남보다 못한 사이로 멀어질 수 있다. 가족은 사교댄스나 거미집, 혹은 고급 도자기로 된 탑과 같다. 구성원 하나가 빠지면 파트너가 바뀌면서 스텝이 꼬이게 된다. 누가 춤을 이끄는지도 모호해진다. 절묘하게 세워진 탑이 균형을 잃고 와해되듯, 식구들이 균형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다.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던 남동생은 갑자기 여덟 살짜리 말썽꾸러기로 변해 당신의 눈물을 쏙 뺀다. 이모는 숨이 넘어가려는 당신 엄마에게 "언니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라고 울부짖는다. 그간 소원했던 사촌 형제는 불쑥 찾아와서 환자가 자기에게 유산을 주기로 약속했다고 공표한다. 그러면 여동생은 "헛소리 하려거든 썩 꺼져"라고 소리친다. 당신은 속으로 부르짖는다. ',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140p)

  나의 가까운 지인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가족관계가 서먹해서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위 내용은 책 목차 '집에서 모신다고?'의 내용입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가정사가 있습니다. 다만 가정 내의 일이기 때문에 선뜻 사람들 앞에서 내놓고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쉬쉬하며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지인은 10년 전 어머니가 별세를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다음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부터 재혼을 한다고 하고, 노총각으로 있던 동생들은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배우자로 삼겠다고 데려오고 재산문제까지 여러 가지 문제가 마구 터져 나왔습니다. 지인은 나름대로 바른 생활을 하며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빈자리로 인해서 생긴 가정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결국 수습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부터 막내 동생까지 지금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 모임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한 세대가 마무리되며 갈등을 겪는 집안들이 아주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네요.

  작가는 임종을 앞둔 가족중의 한사람을 병원이나 의료 시설이 아닌 집에서 간병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비합리적인지를 알려주면서 가족간의 갈등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을 위한 모든 시설이 갖춰진 병원에서 의료서비스를 받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환자에게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며, 돌발 사태에도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습니다. 현대 의학이나 문화의 발달로 갖추어진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도 환자를 위한 좋은 선택이 아니고 나아가서는 가족 간의 갈등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BBC와 했던 인터뷰는 주목할 만하다. 당시 포터의 아내 역시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포터가 직접 간병을 했다. 인터뷰 중에 포터는 느긋하게 웃으면서 특유의 냉소적 유머를 날렸다. 모르핀과 샴페인과 담배가 어우러진 통증 완화제가 한몫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죽음으로 삶을 새롭게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포터가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묘사하며 말했다. "자두나무인데, 꽃잎이 꼭 장미 같아요. 하얀 장미, 예전엔 꽃잎을 바라보면서 ", 꽃이 예쁘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글을 쓰면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세상에서 가장 희고 가장 탐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꽃이 보이더군요. 이제야 그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세상 만물이 전보다 더 사소하기도 하고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차이는 별게 아닙니다. 다만 만물의 모습이,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그 모습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포터는 그 느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우리더러 직접 경험해보라고 덧붙였다그 찬란함을 직접 경험해보십시요.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 물론 나는 삶들에게 위안을 주는 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 처지에 무슨..... 다만 현재를,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온전히 보라는 겁니다! 감탄이 절로 나올 겁니다."

  포터는 아내를 보내고, 9일 뒤에 눈을 감았다.(179p)

  바쁘게 살다보면 평범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꼭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특별히 날씨좋은 날을 고르지 않더라도 출근길에 보이는 평범했던 풍경들이 자세히 보면 아름답고 감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꽃이 됐든 풍경이 됐든 사물이 됐든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동양 고전에서도 인생을 살다보면 지나가다 보는 풀입하나도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어리고 젊었을 때는 자기를 가꾸면서 아름답게 보일려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진 사람들한테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평범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작가가 소개한 포터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내심 상처받을까 두려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사랑을 자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죽으면 더 이상 두려워할 게 업다. 가장 지키고 싶어 한 것을 결국엔, 결국엔 잃고 만다. 그러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그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인간적 두려움, 즉 남들의 시선에 대한 우려, 우리의 자존심, 체면 따위가 실은 별게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잃게 될 것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의 심장은 더 이상 자제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애통은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갈 기회이다. 애통은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 내쉬는 또 다른 숨이다.(292P)

  목차 '애도'에 나오는 보낸 사람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다시 긍정적으로 표현한 글입니다. 아무리 알찬 인생을 살아도 보낸 사람의 마음은 아프지 않을 수 없겠지요. 더구나 인생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지인을 떠나보내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인간의 삶속에서 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면 관계도 상하고 때로는 몸은 가깝지만 마음은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본문의 말처럼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조그만 자존심 때문에 관계에 대해 힘들어합니다. 망자가 숨을 거둔 후에 또 다른 숨은 우리가 망자에게 전해받는 인생의 여유와 사랑의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며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보내는 마지막 인정으로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작가는 망자를 떠나보내며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아름답다고 하는가? 봄기운에 싹을 틔운 꽃망울, 가을 산을 물들이는 단풍, 산비탈에 걸린 석양, 아름다움은 스러지기 시작하는 순간에 가장 강렬하다. 석양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저문다. 우리는 위태로운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눈앞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변화무쌍한 삶에 간절히 매달린다. 우리는 나날이 빛나는 특별한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것에는 죽음이 따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완벽한 만남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 우리는 스러져가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 뺨에 와 닿는 숨결, 물 한 모금, 힘없이 떨어지는 단풍,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우리 자신의 삶, 딸기, 이슬을 머금은 새빨간 딸기 하나.

  캐롤이 떠나고 몇 달 뒤, 여느 때처럼 봄이 찾아왔다. 봄이 되자 캐롤이 더 생각났다. 오리건주의 봄은 눈길 돌리는 곳마다 숨막히게 아름답다. 나는 캐롤이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언덕배기에 가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런데 잠시 조용히 지내려던 계획과 달리 세상이 나를 끈질기게 불러냈다. 온갖 소리가 나를 깨웠다. 샤워를 하는데 연녹색 구리가 툭 튀어나왔고, 풀밭 위에선 흰머리독수리가 유유히 날아다녔다. 상추를 뜯다가 갓 부화한 개미들을 봤다. 눈앞에 보이는것들이 저마다 소리쳤다. 꽃과 개미, 풀밭과 새와 사람들이 소리쳤다.

"나 여기 있어"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데이비드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캐롤의 무덤에 새가 둥지를 틀어 자그맣고 하얀 알을 네 개나 낳았다는 소식이었다. 둥지는 캐롤의 묘석 바로 옆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캐롤의 묘석이 둥지가 되었다.

  '캐롤이 무척 좋아했을 텐데.'

  다음 순간, 캐롤이 진짜로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었다. 아마 우리를 보고 환히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여기 있어".

  캐롤은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지만, 그 대신에 다른 게 찾아왔다. 개미, 개구리, 독수리, .(297P)

  작가의 글솜씨가 좋은지 아니면 번역가가 번역을 잘했는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너무 화려한 문체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절대공감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습니다.

  불교의 윤회처럼 망자가 죽고 난 뒤 살아있는 사람이 기쁨으로 표현할 만큼 아름다운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망자와 같이 지내왔던 시간이 소중했던 것이고, 주변의 지인들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시각각 세상은 변하지만 그 속에서 같이했던 망자와의 인연이 자연의 생명체로 다시 환생하는 것처럼요. 같이 했던 망자의 지인들도 죽기 망자와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고요. 작가의 친구가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모든 생명은 윤회한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본 의미 있는 책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기 전엔 죽음이 당장 다가올 내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삶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노년기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습니다.

  작가의 삶에서 현실적인 조언이 되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고 떠나보내는 사람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며 글을 마칩니다.


  여러분들에게 '삶'과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전 감상문들이 너무 길어서 요약했는데도 길어진 글이네요. 앞으로 더 간단히 요약해서 쓰는 법을 익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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