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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運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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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이미지

운명의 사전적 의미: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 앞으로의 존망이나 생사에 관한 처지(다음 백과 인용)

 

최근 필자는 열흘 사이에 다섯 곳의 상가집을 방문했습니다. 날씨가 차가워지다 보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과의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상가집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최근 본 임종은 평범한 임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안타까운 임종도 있었습니다. 

삶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때, 삶의 정의는 자기 자신만이 정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생을 마치는 시점에서 타인이 보는 삶의 관점은 개인이 생각하는 삶의 정의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 사람의 삶이 그 사람에 대한 역사라고 생각된다면, 망자를 마주하는 제 삼자는 그 삶에 비추어 다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고, 다시 객관적인 삶에 대한 평가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 한 사람의 역사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안타깝지만 필자가 만난 최근의 특이할만한 운명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운명 1:

사연은 망자가 결혼을 하고 가정이 있었음에도, 또 다른 여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상적인 가정을 이끌지 못하고 운명을 했고, 그러므로 인해 운명을 다해서도 자손들한테 냉소를 받았습니다. 상주인 지인 역시도 자신의 가정이 정상적이지 못해 자신의 처지를 평생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떳떳하게 가정에 대하여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운명 2: 가족들의 원만한 삶에 대한 도움과 지원이 있었음에도 평생 방황을 하다가 객사를 한 운명.

개인적으로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50대의 망자입니다. 사연은 정상적인 가정과 집이 있고, 집에서 원만한 삶을 살도록 지원을 하는데도 수십 년간 자신의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살았던 분입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아들이 보고 싶어 전국을 떠돌며 아들을 찾아 헤매기도 했고요. 결국에는 찾았지만,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 깊은 골짜기 산사같은 곳이 있을법한 산골에 살다가 객사한 경우입니다. 살아있을 때 친구관계나 다른 인연이 없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곧바로 화장만 했습니다.

어떤 악마의 유혹에 빠져 평생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렁에 빠지는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애쓴 가족들의 보람이 헛되이 된 것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50대면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얼마든지 더 밝은 세상을 가족들과 함께 보냈을 텐데요.

 

운명 3: 젊은 나이에 희귀암으로 운명을 한 젊은 20대 여식.

개인적으로 제일 안타까웠던 망자입니다. 20대인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얼굴 안면에 생기는 희귀암으로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인의 여식입니다. 장례식장에 가서도 현관에 걸려 있는 망자의 영정사진을 한참을 멍하니 보고 서있었습니다. 아직 죽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젊고 밝은 사진 속 얼굴이 필자의 생각과 매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환자 본인의 육체적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수많은 시간을 환자의 고통을 온전히 지켜보고 있었을 가족들의 아픔도 같이 전해오는 것 같아 몹시 괴롭고 안타까웠습니다. 망자의 아버지는 암이 발병하고 2년 동안을 병원을 오가며 통원치료를 하며 같은 20대 젊은 암환자들을 봐왔다고 합니다. 평소 직장이나 학교에서 건강한 사람들과 생활을 하지만, 병원에 가보니 젊은 나이에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이 많이 놀라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참 꿈도 많을 나이, 멋도 내고 싶은 나이, 연애도 하고 싶은 나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을 텐데요.  

 

 

 

웰빙,웰다잉(WELL BING, WELL DYING)

한 때 유행했던 유행어입니다. 한 개인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다른 행복의 기준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삶의 마지막은 모두가 다르게 보입니다. 적어도 그 사람을 알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개인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많은 관계 속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잘 살아가는 것이 웰빙이라면, 삶의 끝에서도 편안하게 임종을 하는 것 또한 좋은 웰빙입니다. 하지만 건강할 때, 살아있을 때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웰다잉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웰빙과 웰다잉은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해야 될 게 아니라 삶의 연장선상에서 같은 개념으로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구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개인의 고유한 가치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었든 잘된 생활습관이든 말입니다. 각자에게 행복의 추구란 알콜 중독자일 수도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예외 없이 누구든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며 희로애락을 했던 가족, 친지, 친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나를 아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개인의 가치관과 행복 추구권도 중요하지만, 같이 공유해야 하는 가치관과 행복이 있다면, 자신의 공유될 수 없는 가치관도 내려놓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게 단 하루를 살고 내일 삶을 마감하다고 하더라도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운명이란 게 인간의 의지와 뜻하는 바대로 되지 않는 초인간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도 원하는 대로 100%까지 채울 수 없지만, 자신이 원하고 노력만 한다면 초인간적이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어 목표에 가깝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최근의 여러 임종의 끝을 보면서 두서없는 글을 써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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