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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김영하 장편소설 <검은꽃>줄거리 및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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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라는 작가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폭넚은 문학적 식견과 독자가 이해하기 쉽고 읽기 쉬운 문체로써 다른 책도 읽고 싶은 생각이 들것입니다. 필자도 앞서 <보다>, <읽다>, <말하다>를 통해 일반독자로서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잠시 다른 책을 읽다가 블로그 이웃님의 리뷰를 보고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등장인물소개

이 소설을 특징 중의 하나가 주인공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어느 한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시대적인 배경과 어우러지는 모든 등장인물의 생각과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등장인물 각각에 담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이정: 동학, 임오군란 때 아비를 잃고 어머니는 가출 함. 그 뒤 보부상에 들어갔다가 탈출하고 멕시코로 향하는 일포드호에 승선하며, 이종도의 딸 이연수와 연인관계가 되지만 평생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음.
조장윤: 구한말 신식군대의 군인출신으로 제대 후 특별한 일을 찾지 못하자 일포드호에 승선. 이름이 없던 김이정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소설 말미에서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세울 계획도 세움.
이종도: 고종황제의 사촌으로 유교적이고 사대부적 사상이 강함. 아내, 딸 이연수, 아들 이진우와 함께 일포드호 승선. 이 소설에서 조선시대의 복지부동한 양반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옴.
이연수: 이종도의 딸로 김이정과 일포드호에서부터 정을 통하고,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재회를 해서 아기까지 갖지만 평생 인연은 맺지 못함.
권용준: 영어를 할 줄 아는 일포드 호의 조선인으로 멕시코에 가서도 농장의 통역 역할을 함. 조선말 개화기 조선과 신문물의 변화의 시대에 민족주의보다는 개인적 이익만 탐하는 친일파와 같은 인물.
그 외 등장인물: 신부 박광수, 조선인 도욱 최선길, 궁중악사, 무당, 상인 등 당시 조선사회 소외계층 사람들이 멕시코로 이주. 대부분이 거대한 변화의 시기에 힘없는 국가의 서러움을 당하는 사람들.


줄거리


시대적 배경은 1905년 대한제국,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외교권을 빼앗긴 혼란스러운 나라였습니다. 한 신문에서 대륙식민회사라는 곳에서 멕시코로 갈 일꾼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옵니다. 사회적으로 소외계층이고 오갈 곳이 없던 사람들은 부농이 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광고에 한인 1033명이 영국 소속의 일포드호에 올라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의 메리다로 향합니다.
김이정이 이 소설에서 첫 번째 등장하는 인물인데 동학난 때 부모를 잃고 부랑아가 된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이 아니더라고 대부분이 가진 재산도 없어 부랑아 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당신 봉전건적이고 유교적 신분제 속에서 양반들의 횡포에 평민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김이정과 박정훈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안돌아가려네 그까짓 나라, 해준것이 무엇이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어려서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만하니 내치지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테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결코 안돌아 가려네. 구리지만 않으면 어떻게든여기에서 버텨보려네.”(84p)
이정이 말했다. "거기에서도 저 조선에서처럼 반상과 노소, 남녀의 구별이 이리 엄할까. 우리가 탄 이 배를 보라. 양반이든 상것이든 줄을 서야 밥을 먹는다. 이정은 머리 위를 가리켰다. 우리 위에 있는 저 양놈들 눈엔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조선놈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의 머리만 셀 뿐 족보에는 관심이 없다."(118p)

1905년 4월 4일 제물포를 출항해서 우여곡절 끝에 1905년 5월 15일 한 달이 넘는 항해 끝에 멕시코 남부의 메리다 항구에 도착합니다. 그 과정에서 열악했던 배의 환경 때문에 전염병으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임신을 했던 임산부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또한 한참 청춘이었던 김이정과 이연수는 선내에서 조선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연수의 아버지는 왕가의 친척으로 사대부가문이므로 조선이었으면 감히 범접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신분에 따른 계층이 있었던 조선이었지만, 이들은 한 배에 타고 난 뒤 모두 같은 처지에 놓입니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 남성과 여성의 유별, 조선에서는 당연시 되었던 권위체계가 배를 타고 가는 사이에 무너지는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멕시코를 향해가는 좁은 선박 안에서 한인들은 모두 똑같이 하찮은 대접을 받습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기나긴 항해 끝에 멕시코의 메리다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처음 대륙식민회사의 광고와는 달리 한인들은 메리다의 여러 농장에 노예처럼 팔려나갑니다. 대륙식민회사에 철저히 속은 것입니다. 대륙식민회사는 조선인들을 속이고 4년 간의 노예계약을 맺었고, 각지의 농장주들이 찾아와 각자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노예처럼 골라 데려갔습니다. 또한 배안에서 나름대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각의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배산임수, 산과 바다, 강이 있는 조선의 풍경과는 달리 굉장히 척박한 땅 멕시코 유카탄에서 처음 겪게 됩니다. 각 농장에 흩어진 조선인들은 천막과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게 되고, 40도가 넘은 고온의 벌판에 있는 농장에서 ‘에네켄’이라는 선인장과 비슷한 식물을 수확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요.
에네켄은 애니깽이라고도 불렸고 알로에처럼 생겼는데 다 자랐을 때 1m~2m까지 자라며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 초기 농장에 투입된 조선인들은 손과 발에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에네켄은 당시 신대륙정벌의 막바지여서 선박용 밧줄의 용도로 주로 사용해서 수요가 넘쳤고, 섬유, 천 등을 만들고 데킬라라는 술의 통칭인 메스칼이라는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농장에는 조선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일을 하고 있는 원주민인 마야인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농장에 투입된 조선인들은 당연히 마야인들보다 일이 서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가시가 있고 억센 에네켄을 제대로 따지 못해 부상이 이어지고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만 겨우 식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카탄에서 남자들에게도 지옥이었지만 여자들에겐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가끔 농장주가 소나 돼지를 도살하면 여자들이 달려가 채 식지 않은 내장과 꼬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었다. 농장의 멕시코인들은 그러는 여인들을 펙(암캐)이라 부르며 낄낄거렸다. 손에 피를 묻힌 여자들이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와 국을 끓이면 아이들은 비린내에 취해 국솥 옆을 떠나지 않았다. 30도를 넘은 더운 날에도 여자들은 치마 저고리를 벗지 못했다. 웃통을 벗어붙인 남자들은 술만 마시면 제 아내를 두둘겨 팼다. 벌써 노름을 시작한 이도 있었다. 노름과 술은 조선 남자들의 뿌리깊은 병폐였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악다구니와 울음소리, 비명과 고함이 밤마다 이어졌다.(132p)
소설의 이야기지만 조선초기부터 이어진 여성들의 인권은 조선말까지 최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들이 유카탄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중국인 기자에 의해서 미국 유학생들에게 알려지고, 조선의 관리도 구출을 하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이들의 구출은 미궁속에 빠지고, 4년이라는 계약기간이 끝나기까지 유카탄에서 일하게 됩니다.
다음은 중국인 기자가 쓴 유카탄의 조선인들입니다.
중국인 허훼이는 이렇게 쓰고 있다. “중국에서 사람을 꾀어 사들이다가 소문이 나빠져 응모자가 없자 이제는 조선에서 노예를 매수하고 있다. (.....) 모두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으니 이곳 본토의 남녀가 보고 비웃는 소리가 가히 듣기 거북할 지경이다. 연일 큰 비 속에 한인이 여러 어저귀 농장으로 흩어져 일할 때 부인이 아이를 팔에 안고 혹은 등데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모양은 실로 우마와 가축과 같고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농장에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몀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하니 차마 못 볼 광경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135p)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연인으로 나오는 김이정과 이연수도 각각 다른 농장에 있다가 김이정의 농장에서 살인사건으로 김이정이 이연수가 있는 농장으로 오게 됩니다. 둘이서 밤마다 사랑을 나누고 아기까지 임신을 하게 되지만, 다시 김이정이 추방되면서 헤어지게 됩니다. 이연수는 출산이 가까워지자 김이정을 찾고자 권용준을 찾아가 첩이 되어 다시 탈출하지만, 끝내 재회는 하지 못합니다.
이연수는 메리다에 돌아와 중국인들에게 억류당해서 착취를 당합니다. 신식군인이었던 박정훈이 농장계약이 끝나고 메리다에서 우연히 이연수를 만나 중국인들한테 빼내오게 됩니다. 그리고 박정훈과 이연수는 부부의 인연으로 살게되는데요. 이후 멕시코 혁명군에 들어갔다가 내전에 끝나고 김이정은 박정훈에게 찾아오지만, 이연수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멀리서 이연수를 보고만 떠납니다.

돌아갈 나라조차 없어진 조선인들은 때마침 멕시코 혁명으로 일부는 멕시코 정부군과 혁명군으로, 또다른 일부는 마야인들의 과테말라 혁명군으로 나누어집니다. 갈길이 없는 일부의 사람들은 메리다와 농장에도 남아있게 됩니다.
그 중 조선에서 신식군대에서 군경험이 있던 조장윤은 이웃나라 과테말라에 혁명이 일어나 거액을 제시한 마야인들의 부탁을 받고 김이정을 포함한 30여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조선인 혁명군을 이끌게 됩니다. 초기 조장윤은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지구반대편에서 세울 계획까지 세우지만, 과테말라 정부군의 위세에 밀려 다시 메리다로 동료 한 명과 함께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끝까지 과테말라 정부군에서 저항을 했던 나머지 조선인 혁명군은 나라 없던 국민의 삶처럼 낯선 땅에서 전원 삶을 마감합니다.


감상평


책의 장르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내용 전개가 관찰자 시점에서 등장인물의 인용문이 거의 없어서 다소 건조하게 느껴질만도 합니다. 특히 누구하나 주인공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없으며, 특정 사건의 전개라고 할만한 특이점도 보이지 않는 소설입니다. 또한 고난에 처한 민족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섣불리 행동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냉정하게 역사의 사실을 전하는 느낌의 소설입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많은 자료와 사전조사가 있었음도 암시하고 있지만, 작가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것은 아마도 작가사 역사의 사실을 전하되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정이 흔들리고 각종 정변이 난무하던 조선 말은 그야말로 목표도 없고 선장도 없는 난파선과 같은 시대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의 초반부터 끝날 때까지 필자가 강하게 느낀 것은 대양의 파도에 흔들리는 일포드 호와 그 안에서 휘청이이는 배와 함께 양반과 남녀의 신분 구분없이 흔들리고 섞이는 과정이, 흡사 조선의 운명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멕시코에서의 노동착취를 당하면서 겪는 그들도 역시 500여년 동안 봉건적으로 갇혔있던 좁다란 조선이라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원하지 않게 외세에 의해 개방이 되고 수난을 겪어야했던 그 시대 우리 선조들의 삶을 1033명의 작은 사회에서 표현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졋힐 때마다 홀수선 아래의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요강이 엎어지거나 깨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토사물과 오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욕설과 한탄, 비난과 주먹다짐이 일상사였고 고약한 냄새들은 가시지 않았다.(41p)
그들이 타고 있던 일포드 호는 더 이상 조선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영국의 배였고, 선원은 네덜란드인, 김이정과 가깝게 지낸 요리사 요시다는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포드 호는 이미 세계였고, 그들에게 명령을 받고 흔들리는 사람들은 조선인이었습니다. 그 안에서의 조선인은 이종도같은 몰락한 양반, 군인, 농민, 도시 부랑자, 파계신부, 무당, 어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과 이력의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식사순번, 아기의 출산과 전염병으로 죽는자, 푸닥거리, 젊은 남녀의 사랑 등 인간사회의 작은 일상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봉건적 유교사회라면 야만적이고 퇴행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에 비추어 보면 배에서의 모든 과정은 평민들의 유교사회로의 탈출이고, 근대로의 전환의 과정을 나타낸 것으롭 보입니다.

일포드 호를 타고 목적지인 유카탄에 도착했지만 조선인들은 또 다른 착취의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세상은 그들이 겪어왔던 유교사회의 착취와는 다른 근세사회의 자본주의적 착취에 내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강산이 있던 조선과는 또 다른 세계이고, 그들이 맞아야할 세계는 또 다른 세계의 질서였습니다. 그들이 척박하고 광활한 유카탄의 땅을 밟았을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주는 막막함은 바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운명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방 어디에도 산이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유카탄의 석양은 느즈막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 일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평생 지평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이 벌판의 황막함은 더욱 강열하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산과 산 사이에서 태어나 산을 바라보고 자랐으며 산등성이로 지는 해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음을 깨달았다. 넘어갈 아리랑 고개가 없는 끝없는 평원은 그야말로 낯선 풍경이어서 사람들은 딱히 바닥이 딱딱해서라기보다 지평선이 주는 막막함과 공허로 뒤척였다.(92p)
이 장면은 산과 강이 있는 조선이라는 닫혀있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근대라는 넓고 광활한 세계로 불려나왔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봉건적 사회에서 벗어나 달라져 버린 세계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질서에 포획되어 농장이라는 축소된 세게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적 일만 수행하는 처지에 몰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란 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개인과 사회체제 사이에서 양자를 중재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국가는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약속해주는 듯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개인의 노동력과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가장 자유롭게 착취할 수 있는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든 종교든 신화라는 허구에 기반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공감을 얻게 됩니다.
조선에서 사회적 주체 또는 지도층이라고 생각하는 이종도는 멕시코에서도 노동을 하기보다는 조국의 처지를 생각해 외세를 물리치고 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고민합니다. 반대로 조선에서 군인이었던 조장윤이 멕시코 전역에 흩어진 한인들을 규합하고 조직해 향후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질서와 원대한 계획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되고 맙니다. 조장윤 역시 ‘신대한’이라는 나라는 자신의 꿈일뿐이었고, 결국에는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동료들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전장에서 도망쳐 나와버립니다.

어쩌면 국가라는 조직이 모든 개인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느냐라는 물음도 던지게 됩니다. 이종도도 조장윤도 리더가 되려고 하고 국가라는 조직을 건설하려고는 했으나 그게 한낱 한 개인인 자신의 탐욕이고 자신들만의 정의나 가치가 아니었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인 요리사 요시다의 발언과 판초비야의 병사의 발언이 인상적입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 만들어낸 거란 말씀이지”

그러므로 국가나 정치나 이데올로기는 이 모두 한 공동체의 구성원을 동원하고 사용하고 처분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부터가 지배층이었던 이종도나 군인이라는 피지배계층에 있다가 국가를 건설한다는 꿈을 꾸는 조장윤이나 자신들의 가치에 따르는 것일 뿐이며, 그 가치 속에서도 모순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체제의 국가든 어느 한 쪽이 지배하고, 다른 한 쪽의 다수는 피지배계층이 생길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더라도 그 안에서도 더 좋은 국가가 되는 길은 찾을 수 있겠지요. 국가 구성원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국가 지도층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도덕적 철학을 가져야 하며, 피지배계층의 고통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모순의 크기도 줄일 수는 있겠지요. .


결론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에서 보는 재미도 있는 소설이지만, 이 책에 담긴 함축적인 의미는 김영하라는 작가의 역량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작가의 말에 “영원히 쓰고 싶은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이 그랬다.”라는 말에서 작가님이 이 소설에 대한 애착과 정성이 어느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엄청난 자료조사에 현지답사까지의 노력이 이 책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어서 그의 작품에 대한 열정도 어느정도인지 가늠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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