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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복수성(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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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라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거라고 생각되는데요. 독일의 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한 후 나온 책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 소속으로 유대인 수백만명을 학살한 전범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아르헨티나에 망명해 있던 아이히만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이 처해집니다.
 
아직 책의 서두를 읽고 있는데, 공감할만 한 내용이 있어 공유해 봅니다.

픽사베이 이미지

악의 평범성과 인간의 복수성

 

수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또 그에 앞서 있었던 경찰심문에서 보인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서 사람들이 탐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특징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흥미로운, 아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중략~~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사유할 능력이 없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했을 때, 의미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에 있어서 '평등'(정체성 또는 동일성)의 다른 측면, 또는 다른 갈고리인 '차이'라고 불럿던 것에 대한 문제다. 인간의 복수성의 우선성은 활동적인 삶(행위와 작업과 노동)과 관조적 삶(즉 사유) 양자를 연결시키는 조직이다. 이 양자에 대해서 아렌트는 기포드 강의에서('사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지'와 '판단'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의한 바 있다.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그렇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된다. 차이가 없다면 결국 인간의 복수성 자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처가 차이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반면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드다고 말한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차이를 구별이라고 말놀이한 것은 '차이'를 '관계적인 것'과 연결지었다는 저에서 시사적이다 차이는 실로 구별인 것이다.
 


철학자들이라서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글입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평범한 사람도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조금 어렵지만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됨, 더 쉽게 말하자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두루두루 여러가지 생각을 한는 것을 말함)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면 '공감능력'에 관한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가 상처받고 힘들어 하면 그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 할 줄 알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닐까싶습니다.
개인도 그러한데 만약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리더라면 더욱 깊은 사유능력이 필요하겠지요.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들이 있었지만, 그 근원에는 리더의 탐욕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부재, 생각하지 못하는 천박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것입니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지만, 전해듣는 뉴스를 보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아픔을 공감할 줄 모르는 리더의 천박성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마음 한 켠에 칼자루 하나를 갖고 있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인을 해하기 위한 칼자루라기 보다는 천박한 타인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용 칼자루라고 하면 맞겠지요. 국제관계에서도 자신의 국가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지녔더라도 천박한 탐욕의 공격에 맞서지 못한다면 향후 존재가 불투명해지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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