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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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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방문


군산에 내려가 이곳 저곳 팬서비스를 하다보니 블로그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휴일을 마치고 올라오는 길에 날씨가 좋아 서산에 있는 해미읍성에 들러 봤습니다. 500년 전에 쌓은 성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깨끗합니다.

성 남문과 동문쪽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깨끗하고 원형이 우리나라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성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인데 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읍성으로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정해현()과 여미현() 두 현을 조선 태종 7년(1406)에 병합하면서 두 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태종 14년(1413)에 병마절도사의 병영을 덕산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성종 22년(1491)에 성벽이 완성되었으니, 병영이 효종 2년(1651)에 청주로 옮겨가기까지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였다. 1578년에는 이순신이 이곳에서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 달 동안 근무했다. 해미읍의 읍지에는 그 모습을 둘레가 6,630척이며 높이가 13척, 옹성()1)이 둘, 우물이 여섯 개 있으며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려 있다고 하였으니 해미읍성을 ‘탱자나무성’[]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밖에서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볼 수 없고 안쪽에만 길게 심어져 있다.

남북으로 좀더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둘레 길이가 1.8㎞, 넓이는 대략 2만여 평쯤 된다. 5m 높이의 성벽이 2m 남짓한 두께로 둘려 있어 쭉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걸린다. 성벽에는 담쟁이덩굴이 보기 좋게 뒤덮고 있어 분위기를 한층 살려 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해미읍성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초판 1995., 20쇄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맨 먼저 관란안내 시간과 문화해설을 들을 수 있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읍성 자체가 문화재이기 때문에 문화해설을 들으면 역사적인 의미도 알수 있겠지요?


성안으로 들어서면 옛날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공원같은 느낌입니다. 파란 잔디며, 멋지게 서있는 나무, 예쁘게 피어난 꽃이 서산시민들이나 여행객들에게 단순히 휴식처로 보입니다.



옛날 관원들의 모형들과 화포, 화차, 투창기, 투석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미읍성이 역사적으로 단순히 군사적인 역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866년 병인박해(천주교박해)때 감옥소 역할도 하고 천주교 교도들을 처형한 사형장으로 쓰이기도했습니다.

유홍준 교수님의 문화 유산답사기에서 <무려 1천여 명이 처형된 형장으로 이용 되었다. 당시 내포땅에는 김대건 신부 아래로 천주학이 크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끌려온 수도 그렇게 많았는데 읍성 안의 한 고목나무가 그 처형장이었고, 처형되기를 기다리는 천주교도들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도 남 죽는 것 보기가 더욱 괴로워 먼저 처형되기를 원했다는 처절한 사연이 거기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자료를 보니까 1천명을 넘어 3천명이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네요. 

이 돌다리는 <자리개돌>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천주교 박해때 관군들이 천주교 신자 한사람을 잡고 패대기 쳐서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지게 해서 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잔인한지 치가 떨리네요.

이 밖에도 다양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합니다. 산 사람을 생매장을 시킨다던가, 물 속에 산 사람을 거꾸로 쳐박아 익사시킨다던가 차마 말하기도 살벌하게 처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나 싶습니다.


병인박해

이 사건의 원인()은 당시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1864년(고종 1) 러시아인이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 통상하기를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요인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조선에 와 있던 몇몇 가톨릭 교도들은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를 한·불·영 3국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 하여,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당시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는 조정에서 이미 러시아인의 월경과 통상요구가 시일이 경과하여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을 때였다. 그리하여 3국동맹이 체결되면 포교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선교사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그들은 지둔()과 무책임한 주선()의 발설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톨릭교를 서학(西)·사학()이라 하여 배척하던 당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조대비() 이하 정부 대관들이 가톨릭 교도의 책동을 비난하자 대원군은 이들 가톨릭 교도를 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1866년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신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산속에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려 죽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때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가 톈진[]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병인박해 [丙寅迫害] (두산백과)

옥사에서 곤장체험하는 관광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문 성곽에 올라가서 성안과 성벽 밖을 본 사진입니다.


200년된 보호수와 동헌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화로운데 역사 속의 해매읍성을 알면 정말 처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서산에 관광을 오시는 분들은 해미읍성과 함께 개심사, 문수사, 삼화목장을 함께 둘러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자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습니다. 여행을 오셔서 천천히 둘러보시면서 문화해설도 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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