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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나는 잘 살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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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살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한다


  책의 장르가 여러가지가 있고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인문학이나 철학, 심리학은 전문가 영역의 학문에 가깝다는 인식으로 일반인들한테 많이 읽혀지지는 않는데요. 반대로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읽고 난 후에도 깊게 여운을 주는 장르가 인문학이나 철학입니다. 기본적으로 독서를 시작했고 삶에 대한 양식을 쌓고 싶다면 꼭 읽어봐야 할 장르도 인문학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일반인들이 인문학에 대한 접근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고도의 기술 발전의 초입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문학이 부상하고 있는데요. 기계문명의 지배를 받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이 있을 때 문명은 더욱 화려하게 꽃피우겠지요.

감상문 내용이 길기 때문에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굵은 글만 읽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 보세요.


지은이: 신도현

장르: 인문

 

  대개 사람이 바쁘게 살다보면 한번쯤 생각하는 것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잘 살고 있을까?’라는 자문을 해보지 않을까 합니다. 각자의 가치관이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물음에 대해 막상 생각을 해 보면 쉽게 정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물음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 인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인문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면 정확히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막연히 정의를 내릴 수 없듯이 책만 읽는다고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내가 또 다른 정의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 인문학에 관련한 책을 읽자고 마음먹었으니 체계적으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 인문학 서고에 책을 고르던 중 적당한 책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책 내용 살펴보기


  책의 구성은 1부부터 8부까지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1부 인문학은 무엇일까, 2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까, 3부 인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 4부 인문학이라는 산에 오르는 방법에 대해 집필되어 있습니다. 5부부터는 공자, 지눌, 칸트, 정약용 등 과거의 많은 철학자와 역사 속 인물을 통해 나를 만나고 저자의 견해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각자의 삶에 영향을 주고 또한 현실 세계에서의 인문학의 정의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부 인문학은 무엇일까

  당장 성과를 내는 것은 실용 학문이지만 실용 학문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삶을 연구하고 사람에게 삶의 의지와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은 실용 학문에게 방향과 아이디어로도 제공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수원지와 수도관이 쓸모없다고, 인문학이 물질적인 성과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깎아내립니다. 쓸모를 지탱하는 쓸모, 그것이야말로 어디에도 없는 인문학의 쓸인데 말입니다.(36p)

  이 책에서는 학술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게 자연과학, 정신과학으로 나누고, 세부적으로 문학, 사학, 철학으로 나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학문적으로 연구를 하면 일반인들한테는 막연할 수가 있겠다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상을 잘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이나 연구가 과거에는 현재보다는 크게 부각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많은 철학자들의 연구를 했음에도 학문적인 영역과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되는데요.

  저자도 지적했지만 앞으로의 4차 산업혁명시대의 발전에 따라 인문학이 더욱 중요한 학문으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사회는 과거와는 다른 문제점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많은 기술 전문가들은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현재의 많은 일자리기 기계화, 인공지능화 되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사라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왔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까라는 근본적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인문학이 현실에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지만, 앞으로 과학기술시대에 기계가 차지한 일자리를 대신해 인간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고 존재이유에 대한 재정립의 기본에 인문학이 쓸모없는이 아닌 쓸모 있는학문으로 자리 잡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자리가 사라진 세상에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학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할까

   2부에서는 우리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을 빗대어 왜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안경, 직각자, , 엔진, 거울, 신발, 지우개 등 흔한 물건들이지만 우리가 사용해본 사람, 그리고 사용용도, 쓰는 사람에 따라서 쓰임새와 의미가 달라지듯이 인문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를 더 선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경이라서

  시력이 나쁜데도 안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 처음 안경을 쓰면 세상이 어때 보일까요? 선명해져 감동할 겁니다. 돋보기는 작아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 주고, 망원경은 멀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이게 하지요. 실제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착용한 렌즈에 따라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겁니다이런 안경처럼 인문학은 우리에게 기존과 다른 세상을 선사합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어쩌면 관점을 공부한다는 말과 같은 게 아닐까요.(39p)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문학자들은 저마다 개성이 있으면서도 일리 있는 관점을 확립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마치 안경을 쓰듯이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것의 결과물이라 할 사상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사상을 통해 그들의 관점을 익히게 됩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있지만 근현대사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마르크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 문학, 사학, 예술,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분야까지 지금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살던 당시 유럽은 지금보다 훨씬 빈부 격차가 심했습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빈부격차가 커져 양극화가 심했음에도 상류층은 개인의 무능과 게으름을 탓했고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에 계급론으로 맞선 겁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 동조하는 이들이 곧 세계에서 들고 일어나고, 유럽은 물론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해방 후 민중화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르크스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관점의 단서를 제공합니다. 관점이 바뀌면 세상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바뀌고, 이후에는 진짜 세상이 바뀝니다.

 

-거울이니까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자기객관화는 꼭 필요합니다. 자기객관화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을 갖고 있습니다. 남보다 더 이기적인 사람이 있고, 고집이 유독 센 사람도 있지요.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있고, 상황 인식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 자체가 큰 문제를 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단점이 있다고 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면, 이 세상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문제는 자신의 단점이 단점인 줄 모를 때 생깁니다 그때는 타인과 원활하게 만나기가 어려워집니다.(51p)

  노자는 모름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모름을 모른 것이 병이다”, 공자도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난받아야 마땅한 무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는 글귀 역시 단순히 자신의 사회적 위치나 분수를 인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며, 이는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도 품고 있습니다.

  주위를 보면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분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본인을 꼰대라고 부르는 데 자신은 정작 수평적인 사람이나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분들이 직장 상사나 선배라면 아랫사람들은 여간 불편하고 답답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실제로 대화를 하다보면 정작 상대방의 말도 듣고 이야기를 이어가야 되는데, 자기말만 하고 상대방에게는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분들이 많습다. 또한 자신의 지식이 옳고 많이 안다고 이야기하지만 듣다보면 틀린 정보가 많은 경우도 많습니다따라서 인문학은 우리에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거울이 되어 줍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꾸 자신을 사유하게 하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합니다.

 

-지우개라서

  한때 힐링이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몇몇 인문학자는 힐링과 인문학 사이에 선을 긋기도 했지만, 사실 인문학이야말로 힐링, 치유의 본거지입니다. 심리학이나 상담학은 근대 들어 생겼습니다. 이전에는 인문학이 치유를 담당했지요.(58p)

  인문학이 가진 치유의 힘은 지우개와 같습니다. 수정테이프나 화이는 잘못 쓴 글자를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덧씌우는 반면 지우개는 글자 하나하나를 깨끗이 지우고서 다시 시작하게 하니까요. 힘을 줘 지우다 보면 팔은 아프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가장 확실하고 반듯한 방법이지요. 인문학은 상처를 잠시 덮어 두라고, 잊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 보길 요구하지요.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61p)

  정신의학 박사인 정혜신님은 자신의 책<당신이 옳다>에서 온 체중을 실어 치유하는 공감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세월호 피해 현장에서, 국가의 폭력으로 상처받는 고문 피해자, 그리고 쌍용차 사태같은 사회적 피해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은 온 몸을 실은 공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유명을 달리한 피해자와 남겨진 가족들의 정신적인 상처는 당해보진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피해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는커녕 그 위에다 소금 뿌리듯 조롱하고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행태에 맞서 정혜신님은 직업적인 의사가 아닌 진정한 사람으로 피해자들을 만나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섞인 현장에서 정혜신님은 가해자들도 역시 정신적인 피해자라고 말하십니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못하지만, 태극기를 든 시위대들의 노인들 역시 가정에서 존재감이 사라지고 세상 어딘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라고요. 정말 나쁜 사람들은 그 뒤에서 이런 피해자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겠지요. 정혜신님이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의학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좋은 의학이나 학문도 인문학이 토대가 되면 약이 아닌 사람의 감성으로도 얼마든지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정신의학이나 상담심리학과 달리 독서와 공부 등 전통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주체적인 치유 여정, 그것이 또한 인문학의 한 강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3분 인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들

-가사를 몰라도 팝송은 즐길 수 있다.

  가사를 다 이해해야만 팝송을 감상할 수 있을까요? 가사를 몰라도 팝송을 즐길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 겁니다. 이처럼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도 반드시 학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평생 문학을 공부한 교수라도 모든 작품을 다 이해할 순 없을 테고요.(71p)

  이 문제는 학문적이나 전문가 영역으로 인문학을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그렇듯 주입식이나 입시교육에 맞추어져 있어서 인문학에 입문하려는 일반인들이 학문적으로 딱딱하게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 같습니다. 학문이든 다른 배움이든 모든 게 기본적으로 흥미를 끌고 재미가 있어야 오래갈 수 있겠지요. 저자는 그래서 먼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 하다고 말합니다.

  작품을 감상하려면 먼저 만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문학에서 듣기평가를 치르듯이 긴장된 상태에서 팝송을 듣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문학 작품을 읽을 때는 국어 시험 문제를 풀듯이 긴장을 해야 할까요. 일단 그런 부담을 내려놓는 게 좋겠습니다.

  책을 읽는 저도 얼마 전 고전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블로그에 올려 여러 사람들과 공유를 하는데요. 제 글을 본 사람이 고전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우 딱딱하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분이 계셨습니다. 막상 고전 소설도 읽어보면 우리 일상의 이야기이고 옛 이야기가 현재에도 공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인데도 일반인들한테는 고전이라는 말에 일단 거부감이 들고 자신이 접근하기 어려운 학문적인 영역으로 인식을 하는 듯 보였습니다.

  문학작품이든 다른 일이든 일단 마음에 벽을 세우지 않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우리가 노래를 듣듯, 가사 내용을 몰라도 팝송을 듣고 즐기듯이 말입니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할까.

  우리가 역사 속 위인을 공부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 사람이 언제 태어나 죽었는지 외우기 위해서일까요.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일까요. 궁극적으로는 계승을 위해섭니다. 위인은 시대를 앞서간 이들입니다. 그들을 삶을 통해 어떻게 하면 지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 힌트를 얻고 실천해야 합니다.(80p)

  꼭 학문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과거와 비교해 보고 더 밝은 미래와 한 층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한 것일 겁니다. 한 가지 예로 지금 우리 사회에 일제 강점기 때와 같은 경제 수탈과 동원은 없는지 성찰하는 겁니다. 강제 동원이라고 해서 그 시절에 준하는 수준만을 문제 삼아서는 안됩니다. 과거처럼 사람을 강제로 동원해야만 그만큼의 열악한 환경이어야만 문제 삼는다면 역사는 줄곧 제자리만 맴돌 겁니다.

  저자는 그래서 요구되는 것이 창조적 계승이라고 말합니다. 감금당해 강제적으로 끌려간 것은 아닐지라도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게 된 이들,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 부당하게 해고된 이들의 공통에 공감하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창조적 계승이고, 역사의 주체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4부 인문학이라는 산에 오르는 8가지 방법

   어떠한 학문이든 가르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학문이나 지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자세와 접근방법이 중요합니다. 앞서 말한 고전을 어렵다고 인식을 하는 사람이나 학생이 어떤 학문을 대할 때 먼저 어렵다는 선입관을 갖고나 지레 겁을 먹는다면 처음부터 흥미를 잃고 의욕을 갖지 못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겠지요. 학문 뿐만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을 접근하는 방법도 중요하듯이 올바로 시작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필요하겠지요.

 

-문제의식이 출발선이다.

  자기 나름의 기준을 세워 읽을 책을 선택하고 순서를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즉 자신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라는 겁니다. 문제의식이란 자기 삶에서 핵심이 되는 근본 질문입니다.(94p)

  문제의식에 대해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문제의식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자신의 성장 배경과 환경에서 문제의식이 생깁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은 사람이라면, 죽음이 문제의식이 될 가능성이 크지요. '왜 사람은 죽어야 할까', '죽음 뒤의 세상이 존재할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죽음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등 계속 자신에게 묻게 될 겁니다.(96p)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독서를 해오면서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막연히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책을 집필한 저자에 대해서 너무 겸손하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싶습니다. 한 가지 더하여 문제의식을 특별하게 생각해 본지는 않았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집어 내기도 힘들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저자는 문제의식을 특별하거나 거창한 게 아니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의식이란 말이 어렵다면, 고민이나 흥밋거리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사랑, 콤플렉스, 인간관계, 말솜시 등 모든 것이 문제의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제의식이 생겨나기도 하고 새로운 질문이 싹트게 됩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 책을 썻다고 하더라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의문이나 질문이 생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읽어라.

  앞서 말한 특별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적 호기심에 인문학 책을 뒤적일 수도 잇을 겁니다. 그런 분들이라면 끌리고 관심 가는 책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 장자에 관해들은 일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인상 깊었다면 장자와 관련된 책을 읽는 거지요. 그런데 장자는 노자의 영향을 받은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이니, 장자를 제대로 알려면 먼저 노자에 관해 알아야 하고, 배경이 되는 전국시대의 역사도 알아야 할 겁니다. 중국 고대철학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하고요.(98p)

  다른 독서 관련 책에서 읽은 이러한 독서 방법을 '확장 독서'라고 이야기 합니다. 한 가지 관심이 가는 분야나 주제의 책을 읽고,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책을 찾아 읽는 것을 말하는 데요. 이 책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독서를 하는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자에 관심이 있다면 장자에 관련된 <장자> 해설서를 읽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흥미를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장자를 알려면 처음부터 더 깊은 책을 읽으라는 조언도 듣게 되는데요. 그것은 오직 참고만 할 뿐, 교양정도의 지식으로도 충분하다고 조언합니다. 그래서 원서 같은 전문 서적보다는 참고용으로 볼 수 있는 관련된 해설서 몇 권 읽은 후 원서를 찾아 읽는 순서가 좋다고 합니다. 어떤 방법이든 책을 읽는 사람이 순서에 구애 받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책을 읽어라.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일차 목표는 성장입니다. 그러면 아는 내용이고 나와 생각이 일치하는 책보다는 낯선 책, 나와 생각이 다른 책보다는 낯선 책, 나와 생각이 다른 책을 읽어야 합니다. 생각이 일치하는 책을 읽으면 그저 반복이지만, 생각이 다른 책을 읽으면 생각이 확장될 수 있으니까요.(107p)

  독서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생각의 확장이라고 생각할 때 매우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정치나 사회도 좌우 아니면 수직적 상하관계로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이 아직은 미성숙해 보입니다. 정치에서는 좌우로 갈라져 자신의 의견 외로는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정쟁으로 몰고 갑니다.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조언을 했을 때 고과의 손해가 오거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낯선 책을 읽으면 책이 제시하는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부딪친다고 합니다. 그 순간 나의 가치관이 깨지거나 두 가치관이 새로이 종합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비판적 자세로 일관해서는 나의 가치관을 깨뜨리기보다는 오히려 이질적인 책의 가치관을 공격하는 데 집중 하게 됩니다. 그러면 변화나 발전으 요원하겠지요.

 

-배운 만큼 꼭 써먹어라.

  송나라 유학자 정이의 말입니다.

  “요즘 사람은 책 읽는 이치를 모른다. 책을 읽을 때에 책을 읽기 전에도 그 사람이요, 책을 읽은 뒤에도 다만 그 사람이라면, 이는 곧 읽지 않은 것이다.(117p)

  지식을 쌓고 이를 실천하지 않으면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면 털끝만큼이라도 변화가 싹터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책을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해서 앎이 생겼다면 그 다음에는 실천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궁국적으로 인문학 공부란 배움을 실천하는 것까지 포합하니까요.

  인문학 뿐만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을 봐도 매일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지식을 알고는 있으나 매일 자신이 계획한대로, 생각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로 보입니다. 더구나 지식을 확장했다면 지식을 조금이라도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이 되는 것이지요.

 

  5부에서 8부까지는 동서양 학자와 사상가의 글을 저자가 독자와 함께 읽어보고 생각해보는 글입니다. 각 부에서 한 사람의 인물만 간추려 올려봅니다.

5부 먼저 나를 찾자

 -공자: 원칙에 목매지 마라.

  ‘꼭 해야 하다는 것도 없고, 절대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없다. 오직 의로움을 따를 뿐이다.’<논어>

  배우고 공부하되 그 공부에 갇히지 마라. 배운 것을 아무런 사유나 비판 없이 실행하지 마라. 철저하게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검증하라. 그리고 현실을 고려해 때에 맞게능동적으로 실천하라. 그런 사람은 주체적으로 공부하고 때에 맞게 실천하여 자신과 세상을 바꾸니 행복합니다.(128p)

  정해진 규칙을 따르기만 하는 사람의 생각은 그 규칙이 아무리 위대한 것일지라도 멈춰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속에는 사유가 없으니까요. 반면 하나의 가치를 지향하되 그 가치를 때와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발현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언제나 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문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배우고 때에 맞게 실천한다는 구절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금기와 규칙을 정해 놓고 따르는 삶은 너무 따분하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스스로의 가치와 꿈을 좇는 삶을 공자는 바랐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그 상황에 주어진 도덕, 법규를 따르면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 내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보다는 자기 삶을 즐기고 자신이 꿈꾼 이상을 사랑하고 펼치기를 제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6부 타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폴 틸리히: 고독해서 사랑한다.

  사랑조차 고독 속에서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고독에 처한 자신들만이 자기들과 분리된 사람들에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영원의 현존만이 일시적 존재를 다른 일시적 존재들로부터 고립시키는 벽돌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여러 시간의 대화보다 한 시간의 고독이 훨씬 더 우리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가까워지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지금>(172p)

  고독은 홀로 있을지라도 외롭지 않은 경험입니다. 고독의 빈곤 안에 모든 풍요로운 것이 존재합니다. 담대하게 고독을 추구합시다. 영원한 것과 마주하고, 다른 이들을 찾고, 우리 자신을 바라봅시다. <영원한 지금>(174p)

  틸리히는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외로움을 이겨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독과 대면한 후 그 시간을 영광되게 보낼 수 있는 사람, 고독 속에서 자신의 고민과 마주하고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사람, 다른 것들과 떨어져 있음으로써 나만의 것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외로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 위인들은 고독을 즐겁게 살아 낸 이들이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시와 철학과 종교, 예술과 혁명은 고독 속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고독하지 않아야 되는데, 역설적으로 최근 많이 듣는 말이 고독사라는 말입니다. 주위를 보면 대도시에서 대기업의 직원으로 투명인간처럼 살다가 고독사한 청년층, 그리고 노년에 오갈 데 없어 홀로 지내다가 독방에서 고독사한 노인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되지만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누구나 고독이 외로움이 아닌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우선은 틸리히처럼 고독에 대한 개념이 홀로 버려진이 아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으로 바뀌는 긍정적인 인식이 중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면 자기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역사 속의 위대한 위인들처럼 말입니다. 진정으로 자기 안에 있는 내면의 거울을 볼 수 있을 때 사람은 고독이 외로움이 아닌 성장 할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 되지 않을까요.

 

7부 세계는 무엇일까.

  7부에서는 자신이 처한 정치적 체제 안에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역사 속 위인들은 잘 알지만 그 위인도 그를 지지하고 따르며 행동해준 민중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겠지요.

 

-브레히트: 역사는 모든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

일곱 개의 문을 가진 테베를 누가 지었는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왕들이 돌덩이를 날랐을까?

그리고 저 여러 번 파괴되었던 바빌론

누가 계속 바빌론을 건설했는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다 만들어진 날 저녁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해한 로마는

개선문으로 가득 차 있다. 누가 개선문을 세웠는가? 로마의

황제가

정복한 것은 누구였는가?

(중략)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혼자서 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무찔렀다.

적어도 요리사 하나쯤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리프 왕은 무적함대가 몰락했을 때

울었다. 필리프 왕만 울었을까?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

승리한 자가 없었을까?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을 누가 차렸는가?

10년마다 위대한 자가 나온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누가 댔는가?

 

수많은 목록.

수많은 의문. <책을 읽는 노동자의 의문>(226~227P)

  이렇게 지배층이 아닌 민중의 입장을 생각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배워 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영웅 중심으로 공부했지요. 북벌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이고, 불국사의 석굴암을 지은 것은 김대성이며, 수원 화성을 건축한 것은 정조, 정약용, 체제공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민중이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런 업적을 쌓을 수 없었을 겁니다.

  예문을 보는 것처럼 역사 속 영웅은 대부분 지배계급이거나 영웅적인 업적을 인정받아 지배층이 된 이들입니다. 이들 위주로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지금의 현실을 인식할 때도 자신의 입장이 아닌, 현재 지배층의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책에서는 사도세자에 관한 예도 들고 있습니다.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끝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책의 내용이지만 왜 뒤주에 갇혔고 왜 영조가 자신의 아들한테 이런 험한 벌을 내렸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죄 없는 궁녀와 내시 수십 명을 별 이유 없이 죽였습니다. 유교적이고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비운의 인물일지 몰라도 민중의 입장에서는 일말의 동정도 베풀기 어려운 악인이지요.

  이러한 민중의 시각으로 역사를 읽으면 새로운 흥미는 물론이고 문제의식도 같이 갖게 되고 새로운 질문도 생길 것 같습니다.

 

8부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석가모니: 충만해지고 싶다면 버려라.

그대의 것이 아닌 것은 놓아 버려라. 그것을 놓을 수 있다면 그대는 진정한 이익과 행복을 오래도록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아함경>

나무는 꽃을 버려서 열매를 맺고

물은 강을 버려서 바다를 만나고

새는 둥지를 버려서 하늘을 날고

사람은 욕심을 버려서 자유를 얻는다.(249P)

  석가모니는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상태인 해탈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나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것에서부터 진정한 행복이 시작된다고 말하려던 것은 아닐까요.

  항상 생각하지만 상업화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버리는 것의 충만을 느끼기에는 현실세계와의 괴리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불가에서 발하는 공수래공수거’, ‘청빈등을 보며 불가의 깨들음을 상기하고는 하는데요. 모두가 그렇지만 청빈을 따르기에는 세속에서의 인연과 현실을 떠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종교의 믿음으로 불가의 뜻을 현실세계에서 따르는 불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불교에 귀의한 스님들조차 자본주의에 물이 들어 진정으로 청빈이나 버리는 것의 충만을 실천하시는 분들은 안타깝지만 극소수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인문학의 관점에서 공부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참고하고 최대한 세상을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갖기에는 최고의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모든 사상과 경전을 보고 공부하는 이유가 아닐까싶습니다.

 

전체 감상평

 

  필자의 지식에도 항상 깊지 않음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지식을 참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산다는 것에 대한 평범한 물음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알 수 있는 도서에 관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저자 신도현 작가님의 집필의도도 책에 잘 나타나 있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지나간 지식인에 대한 예와 겸손함도 깊게 글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습니다. 같은 학문의 책을 읽어보려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의 깊이와 생각의 한계를 느낀 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막연한 인문학에 대한 정의가 될 수 있었던 나만의 정의조차도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의 정의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인문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영역에서 평범한 주제를 여러 방면에서 다각적으로 생각한 학자와 지식인들이 많은 줄도 몰랐습니다.

  처음에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처음에는 지난 과거 국민에 대한 정부의 공적 폭력을 보면서 였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세월호,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등에서 공감할 수 없는 국가 폭력에 대해 국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한테 과연 도덕성과 공감능력이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면서부터였습니다. 최근에 가장 크게 국가적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대통력까지 탄핵되는 불행한 현대사를 겪으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공적인 영역에서 인문학을 생각했다면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구성원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리고 가정 개인에 있어서 인문학이 점차 관심이 커져갔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면서 공적 영역보다는 미래에 대한 인문학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인데요. 지구탄생과 함께 시작된 인류의 문명 20만년 중에서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13000년을 놓고 볼 때,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약 500년 전부터입니다. 그리고 1차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이어진 2, 3차 산업혁명을 그 기간이 더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물질적으로 풍요화 삶의 질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그로인해 상업적 사회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의 의미도 덩달아 상업화의 물결에서 벗어 날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나 용산참사같은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계층의 기득권을 위해서 다수의 국가구성원이 희생되는 것을 모든 국민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4차 산업혁명의 급격한 기술적 변화를 인지한 사람이라면 많은 부분에서 자동화가 되고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의 삶에 엄청난 변화도 있을 것이라고는 것을 알 것입니다. 어떤 전문가는 2040년이면 인공지능은 개별적인 기계로서의 지능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와 연결되어 초지능을 가진 존재, 즉 사이보그가 탄생 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대비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은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에 가장 크게 영향을 주겠지요. 더 나아가 인간이면서 기계이기도 한 존재, 기계이면서 인간의 감성과 철학을 가진 존재가 탄생한다면 과연 진짜 인간의 역할이나 존재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큰 문명의 변화 앞에 선 우리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이 크데 이슈화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하더라도 그 중심에 인간이 배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다행히 많은 분야에서 이런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학계나 기업, 국가 뿐만아니라 개인도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술적 발전이 주는 미래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누군가에게 소비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사람과의 현실은 풍요가 될 수도 불행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 인류가 미래를 준비하고 인문학을 공부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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