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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어느 괴팍한 할머니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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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괴팍한 할머니의 시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를 읽으며 인상적인 시가 있어 포스팅해 봅니다.

이 시는 스코틀핸드의 한 노인 병원에서 홀로 외롭게 살다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의 유일한 유품으로, 병원 간호사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간호사 아가씨들!

당신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나요?

내가 어떻게 보이냐고 묻고 있잖아요.

당신들은 날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죠?


당신들한테 난 그저,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고약한 데다

눈동자마저 흐릿한 할망구일 테지요.

식사할 땐 칠칠맞게 흘리기나 하고

당신들이 큰 소리로 나에게

"흘리지 좀 마세요!"라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런 때꾸도 못하는 노인네......


목욕 하라면 목욕하고

밥 먹으라면 밥 먹고

좋건 싫건 당신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는 무능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인가요?

그게 바로 당신들 눈에 보이는 '나'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 보세요.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제대로 바라보아 주세요.


이렇게 여기,

당신들이 주는 대로 음식을 씹어 넘기고 있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 말해 줄게요.


난 열 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난 꽃다운 열여섯 살 처녀랍니다.

두 팔에 날개를 달고

이제나 저제나 사랑을 기다리며

밤마다 꿈 속을 날아다녀요.


난 스무 살의 아리따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지요.


나는 또 스물다섯 엄마이지요.

아기를 품에 안고 보듬고 있어요.


그러다가 서른이 되고 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 버리고

더 이상 내 품에 안겨 있지 않네요.


마흔 살이 되고 보니

아이들은 모두 자라 집을 떠났지만

다행히 남편이 곁에 있어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로만 밤을 지새우진 않아요.


쉰 살이 되고 보니 또 다시 내 무릎 위에

아기들이 앉아 있네요.

사랑스런 손자 손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난

참 행복한 할머니지요.


그러다가 암울한 날들이 찾아오네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어요.

홀로 살아가야 할 시간이 두려움에 저를 떨게 하네요.


나의 자식들은 제 자식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요.

젊은 시절 내가 자식들에게 쏟아 부었던 그 사랑을

나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지요.


그러다가 또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이렇게 오갈 데 없는 늙은이가 되어 버렸어요.


세월은 참 잔인하기도 하죠.

사람을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 놓으니......


몸은 쇠약해지고 

한때 지녔던 기품과 열정은

영원히 날 떠나 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고동쳤던 나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이젠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자리 잡고 있네요.

하지만 아세요?


쭈글쭈글한 이 몸뚱이 안에

아직도 열여섯 살 처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이 쪼그라든 심장도 쿵쿵거리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도 난 기억한답니다.

젊은 날들의 기쁨을, 그리고 또 아품을,

할 수만 있다면 사랑도, 인생도

다시 한번 누려보고 싶어요.


가는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도 짧았고,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렸네요.


네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제발 눈을 크게 떠 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보아 주세요.

괴팍한 할망구라니요.


제발,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나를 바라보아 주세요.

'나'의 참모습을 말이에요.



이 시로 할머니의 인생이 모두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지만, 누구나 비슷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열 살 소녀에서 어느새 처녀, 엄마, 그리고 병상에 누워있지만 할머니까지의 삶에서 순수와 마지막 체념까지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이러한 시를 보면서 새해를 맞이한지 얼마되지 않은 지금, 이런저런 핑계로 게을러진 '나'를 발견하고 반성해 봅니다.

요즘 뭐가 피곤한지 책을 읽다가 앉은채로 꼬꾸라져 잠이 든 '나'를 발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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