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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좋은 글

자신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글쓰기(책, 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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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이미지

 

자신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그 자신과 동행할 수 있다.

 

-고통의 당사자는 어떻게 스스로 자신의 곁에 설 수 있는가? 절규하는 자에서 말하는 자로 바뀔 수 있는가? 근대 사회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훌륭한 도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보편화 했다. 바로 글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뿐만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홀로 남을 때 사람은 비로소 '남을 넘어선 남', 남이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남을 넘어선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그에 비추어 자기에 대한 앎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이해를 구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때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도 자기를 납득하지 못할 때가 아닌가? 그것은 인간이 바로 '자기의 복수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그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도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인 복수성을 짓는 '구축의 도구'이기도 한 셈이다.

 

 

-글이 사람의 귀를 열게 한 것이 아니라 귀가 열린 사람이 글을 읽고 참조했다. 귀가 열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쉬운 말로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게 불가능하다.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고통에 대한 기록에는 고통을 겪으며 그들이 발견한 것, 그에 대한 해석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이 기록과 해석을 읽으며 질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글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식과 학문을 배우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도 있지만, 개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 정확히 알아가는 도구가 아닌가싶습니다.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랭크처럼 '키티'라는 일기장과 글쓰기를 통해 또다른 자신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완벽한 아이>를 쓴 모드 쥘리앵은 18살이 될때까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성장환경 속에서도 글을 통해 울타리 안이 아닌 집밖의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도 어쩌면 모드 쥘리앵의 어린 시절처럼 자신만의 두터운 성을 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일입니다. 요즘 세대에서 나이를 먹은 사람들한테 '꼰대'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새로운 정보에 유연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하는 말인데, 꼭 나이를 먹지 않아도 자신만의 신념이나 생각이 굳어 있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내면의 두터운 성을 깨는 것이 독서와 글쓰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읽기와 쓰기는 '자신의 가치관을 깨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환경을 통해 굳어진 가치관이 전문가 또는 앞서 살아간 사람들을 통해 생각이 깨지고 새로운 가치관을 새우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나이를 먹어도 정신이 젊고, 어떤 사람은 나이가 젊은데도 깨어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책을 읽으면서 메모한 노트 글을 읽으며 생각나는 대로 포스팅에 올려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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