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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김영하 산문 <보다>, 전체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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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마다 단편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각 부마다 작가의 과거 경험, 독서, 영화 등의 내용을 작가만의 생각으로, 독자가 알기 쉽고 공감하기 쉬우며 명쾌하게 쓰여졌습니다. 사실 독자들 모두가 공감하며 겪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나 경험이 외적으로는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고, 같은 감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건도 각자 자신만이 살아온 경험과 환경에 비추어 다르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읽은 작가님 또한 자신만의 직접적인 경험은 아닐지라도 독서, 영화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시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도 독자들이 이 산문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메세지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 감상문에서는 1부와 4부까지 내용 중 필자에게 더 공감이 갔었던 내용만 하나씩 올려보았습니다.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던 시절 등장인물의 부와 가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드러낼 것인가.” 여러 답변들이 나왔다.(24p)

  “무지요.”

  뒤쪽에 안자 있던 학생 하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무지요. 가난에 대한 무지, 부에 대한 무지요.”

  빙고.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25p)

  처음에 이 글을 보고 필자도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번 읽었습니다. 이어서 바로 위 글이 무슨 뜻인 알 수 있는 예를 들어 주었습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재벌집 아들 김주원(현빈)은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에게 천진한 얼굴로 이렇게 묻습니다.

  “이봐, 길라임씨.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뭐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하면 오랫동안 저축도 하고 마음도 졸이고, 뭐 그러는 거야?”

  재벌집 아들 김주원이 타고 다니는 수입 컨버터블이나 고급 양복, 대저택이 아니라 이런 천진한 무지가 그를 정말 타고난 부자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또 프랑스 혁명당시 프랑스 군중을 격분시킨 마리 앙투아네트의 루머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도 가난한 민중의 삶에 대한 무지였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정말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면 그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들에 대한 엉터리 속설들을 말하게 하면 됩니다. 부에 대한 자기만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과장이 그의 가난을 좀더 실감나게 드러냅니다.

  작가는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짝이 전직 국회의원인 친구가 있었는데, 귀티나는 외모와 온유한 성격 그리고 예의까지 바른 친구였다고 합니다. 어느날 친구가 작가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는 순간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보고 말했던 기억을 상기해 냅니다.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

  그의 말에는 어떤 공격성이나 비아냥의 기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의문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고 이런 천진함과 무지야말로 그가 가난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의 다른 예를 통해서 다른 모습의 부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명은 데이비드 크로버넌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에 등장하는 영화 속의 부자 에릭 패커(로버트 패티슨). 에릭 패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소유의 부자 즉, 주식, 부동산, 리무진 자동차 등 돈이 되고 외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그야말로 소유의 부자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의 부자입니다. ‘집 없는 억만 장자니콜라스 베르그루엔. 그는 재산은 이십억 달러라고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소유하고 보여지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소유한 투자회사와 언론사, 백화점등 다수를 교묘하게 소유할 뿐 외적 보여지는 재산은 없습니다. 2013년 당시 그가 소유한 것은 아이폰과 정장 세 벌, 전용기 정도였다고 합니다.

  책을 통해서 두 부자의 예를 보고 있는데 에릭 패커는 소유의 화신이고, 베르그루엔은 무소유의 억만장자입니다. 베르그루엔의 경우에서 보듯이 현실의 억만장자들은 소유에서 탈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무소유가 가장 영리하게 부를 소비하고 현실적이라는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사업이나 약간의 주식을 투자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지만, 엄청난 세금의 지출을 아끼고 부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 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작가님은 자본주의 지배구조에서도 부자들은 정치체제보다 더 진화 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지를 넘어 그들만의 또 다른 세계로 진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이제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선택의 여지 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31p)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경우이든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선택 이후 삶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부자들의 무소유가 더욱 상반되게 다가오는 글이기도 합니다. 어떤 무소유를 선택을 하든 선택도 결과도 본인들의 몫이겠지요.

 

 

나쁜 부모 사랑하기

 

  아이는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애쓴다고 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게 확실한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기를 마뜩지 않아하는 부모의 마음에 드는 게 생존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녀)가 자기를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나쁜 부모는 바로 그것 때문에 아이에 대해 힘을 갖게 된다. 나쁜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아이는 끝없이 노력하고 부모는 너는 영원히 내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암시하고,아이는 또 노력하고 부모는 또 암시하고....(76p)

  우리는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건강한 사람이 연인과도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어러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람은 연인의 사랑을 끝없이 확인하려 들 것이다. 수십 통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소재를 확인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이는지를 보려 한다.(78p)

  이 주제에 대해서는 부모나 자식 간의 이런 관계에 대한 비유로 가득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마스터)의 예들 들고 있습니다. 주인공 프레디는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있는 남자입니다. 영화 속 프레디는 해군 병사시절 민망한 방아질, 광기에 찬 눈빛, 정상적이지 못한 여자관계, 밀주 제조 등 온갖 좋지앟은 행동을 일삼습니다.

  그러던도중 신흥종교의 교주 마스터랭커스터와 만나게 됩니다. 이 남자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서양 바다 위 배에서 만난 프레디에게 랭커스터는 아버지이자 마스터였고, 랭커스터도 프레디를 받아들입니다. 프레디는 랭커스터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랭커스터가 경찰에 체포될 때에는 충실한 개처럼 주인(마스터)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에 달려듭니다. 프레디와 랭커스터는 전형적인 나쁜 아버지, 나쁜 연인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아이와 연인이 정말 원하는 사랑은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상대방에게 자신이 사랑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암시를 주고, 이를 통해 사랑과 애착에 굶주린 아이와 연인을 움직입니다.

  프레디가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은 랭커스터라는 아버지가 실은 약점으로 가득찬, 그 자신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아버지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그들 역시 언제나 아버지를 찾고 그 아버지는 때로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 속에 있을 수 있다. 영악한 아들들은 아버지들의 그 약점을 파고든다.(82p)

  영화 후반부의 인상적인 장면을 작가님은 아버지의 굴레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어느 날 랭커스터는 프레디를 데리고 사막으로 간다. ‘마스터랭커스터는 프레디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정해진 지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시험을 부과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람을 달리던 프레디는 반환점을 돌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버린다.>

  작가님은 부모님의 삶의 영역 안에서 심리적 울타리가 되어 생각의 확장을 하지 못하는 것과, 진정한 를 찾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도 자신의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나약한 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다.(83p)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성장과정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거인입니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도 자아가 형성되고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생각 안에 머물러 있다면 바뀌어가고 진보되어가는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나야 할 자식은 미래가 두려울 수 밖에 없고, 도전보다는 지레 겁먹고 알던 길(모르는 것이나 도전의식이 없는)로만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가정에서의 제약된 환경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호연지기를 길러주는 환경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부모가 살아온 세상과 앞으로 자식세대가 살아갈 환경은 확연히 다를테니까요.

 

 

앞에서 날아오는 돌

 

  이 글은 작가가 대학교 사학년 때 점을 보러 간 일입니다. 대부분의 여자분들은 사주나 점을 보고 자신의 궁금한 미래를 미리 예측해 보기도 하는데요. 작가님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미래가 무척이나 궁금했었나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님이 경영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으로 사회에 진출하지 않고 이렇게 점을 보고가서 미래가 결정이 되어졌다는 점입니다. 꼭 점이 그 때부터 운명을 결정지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기하게도 그 당시 점쟁이의 말대로 삶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당시 629선언과 88올림픽 이후 호황을 구가하기는 했으나 외부적으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도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작가님도 그에 대해 동조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점쟁이와 상담을 하면서 작가님은 두 가지 예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 나라는 앞으로도 꽤 흔들리기는 하겠지만 뒤집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 혁명가를 꿈꾸신다면 감방에나 들락거리다 인생이 끝날 겁니다. 당신 사주에는 그런 운이 없습니다. 앞에서 날아오는 돌을 피할 수는 있지만 힘이 든다는 게 바로 그런 뜻입니다.”(149p)

  그래서 작가님이 질문을 합니다.

  그럼 저는 어떤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 사주에 말씀 언자가 둘이나 들어 있습니다. 말과 글로 먹고 살게 될 겁니다. 그쪽으로 가면 사십 년 대운입니다.”(150P)

  정말 신기하게도 그의 예언은 하나 둘 맞아들어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잡지 고료를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단행본도 출간하게 되고 그렇게 번 돈이 대학원 등록금을 내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군 전역 후에도 작가로 등단하고, 라디오 진행자, 교수, 시나리오작가 등을 거처 소설가까지 글과 말로 먹고 살거라는 점쟁이의 말이 제대로 맞아 떨어진 세이었습니다.

  사실 필자 역시도 점이나 운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젊은 혈기와 도전적인 호기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운이나 점 따위를 믿느니 이렇게 지식을 쌓아서 미래를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미래란 언제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았고, 그리 나쁘게 살지만은 않은 인생이지만 내 마음처럼 흘러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작가님의 글을 보면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 번쯤 재미로라도 운명의 점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지만 작가님은 운이나 점으로 내 운명을 가를 수는 없지만, 자기만의 암시로 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조언도 해줍니다.

  우리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운명예정설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에게 자기 실현적 암시가 꼭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는 것.(154p)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자기 자신의 암시와 신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된다는 것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인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다른 운전자들에 비해 운전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다든가, 대학 교수들리 동료 교수에 비해 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은 어떨까? “당신은 쉽게 예측이 가능한 사람입니까?” 대부분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나부터도 남에게 쉽게 예측되는 사람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링크><버스트>의 저자인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측 가능한 인간이다. 놀랍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의 93퍼센트가 예측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아직 진실의 순간과 맞닥뜨리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179p)

  이러한 사실들은 사람들의 패턴을 분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 식사를 밥과 국으로 하거나, 선식을 먹는 사람, 토스트로 해결하거나 아예 먹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날마다 비슷한 메뉴를 먹고 일정한 시간에 직장으로 향합니다.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서 자동차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가는 행동까지도 거의 비슷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거나 검색을 합니다. 날마다 그렇게 합니다. 회사에 도착해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열두시가 되면 점심을 먹으로 회사 밖으로 나옵니다. 메뉴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식당과 직장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을 뿐 동선은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오후 업무를 보고 출근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합니다. 이 패턴은 주중에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주말에는 주말대로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비슷합니다.

  요즘 기업들은 이런 패턴을 좋아해서 빅데이터라는 자료를 모아 데이터를 분석해서 마케팅과 미래 경영전략에도 사용을 합니다. 심지어는 스마트폰 위치정보를 활용해서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는지까지 알고 있습니다. 예측 뿐만이 아니라 나의 행동 패턴 모두 예측 가능하기도 하지만, 기업의 빅데이터는 나의 행동패턴 모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되면 편리한 점도 있겠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쩐지 기분 나쁜 일이다. 국가정보원이나 기업, 웹사이트 방문자가 내 일상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아예 예측까지 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그 예측에 기반을 두고 우리를 조종하려 들지도 모른다.(184p)

  여기까지 보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똑같이 우리 현실이 전개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소설 속의 독재자 빅 브라더가 거대 콘텐츠 기업과 큰 정보조직일 뿐 우리 현실은 항상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기분 나쁜 현실임에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은 자신이 현실적이고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만의 착각 속에 사는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님은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신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객관화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184p)

  생각해보면 일상의 탈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요. 주변을 보면 그 생활 패턴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복지부동형의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예측이 가능, 불가능을 떠나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으로만 남게 될 텐데요. 그래서 언제든 엉뚱하다라는 말이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때는 삶의 활력소나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이런 노력조차도 자신이 지금 현재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지금보다 더 성잘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185p)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이 세상에서 이 사회에서 라는 존재를 얼마나 객관화 시킬 수가 있느냐가 문제인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 글처럼 이 세상에서 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것을 깨닫는 시점이 언제가 되는냐가 중요하겠지만, ‘의 존재를 죽음에 가까워 깨닫는다면 그렇게 불행하게 생각되는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전체 감상평

 

  산문이라는 장르 자체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책 마지막 <작가의 말>중에 가장 알맞게 표현된 김영하 작가님의 생각이 담긴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209p)

 

  우리는 수많은 정보 중에서 정작 필요한 정보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은 그나마 근사하게 표현해서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이라고 표현했지만, 직접적인 표현을 하자면 쓰레기 정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정작 필요없는 정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순간의 즐거움이나 쾌락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에 불필요한 정보를 무분별하게 소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글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다시보는 혜안을 갖는 것은 아무리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인 시대라도 글이 최고가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작가님의 직업이 글을 쓰는 전업 작가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글 속에서 다양한 매개체인 책, 영화, 드라마 등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한 가지 주제를 통해 다양한 시선으로 생각하는 게 한층 깊이 있어서 놀라웠습니다. 물론 세상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면 그보다 더 좋은 수양의 방법과 지혜는 없겠지요. 앞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이나 영화도 그냥 시각적으로 즐기기만 하면 더 이상 사고의 영역으로 다가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작가님은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양한 생각을 산문으로 알기 쉽게 독자에게 전달한 것 같습니다. 간접적이지만 계속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글을 쓰는 분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은 분이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가이라서 다양한 관계에 대한 이해도와 상황등이 작가님의 독특한 생각으로 잘 전달 된 것 같습니다.

 

  책 자체로 본다면 글이 길지 않고 짧은 단문 형식이기도 하며, 글 자체가 지루하지 않아 초보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긴 전문 서적이나 철학서를 읽다가 머리를 식히고 상쾌한 느낌까지 들게 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길지 않은 책이지만 책 안에 심리, 철학, 초 기술사회 속에서 개인의 입지도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어서도 매우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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