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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줄거리,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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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김불이: 키 117cm 몸무게 32kg의 신체를 가짐. 이 책의 실질적인 난장이 주인공이며 아내와 3남매(영수, 영호, 영희)를 둔 가장. 이 책에서는 소외계층과 도시빈민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삶의 희망이 없음을 비관하여 굴뚝에서 뛰어내려 자살함.
김영수: 김불이의 큰아들. 소외계층이지만 어떻게든 가난을 탈출하려 공부도 하고 책도 읽으며 노력하고 사업자들의 부당함과 불합리에 대응해 노조활동까지 하지만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업체 사장을 살해하려다가 사장 동생을 살해해서 사형을 받게 됨.
김영호: 김불이의 둘째 아들.
김영희: 김불이의 삼형제 중 막내딸.
지섭: 대학을 중퇴한 사람으로서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고 김불이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전국의 공장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청년.


줄거리

때는 1970년대 서울의 빈민촌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불이 가족은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에 살고 있는 도시 소외계층의 가족입니다. 동네이름이 행복동이지만, 이 집의 장남인 영수는 이곳을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수의 일가족의 행복동에서의 삶은 매일매일이 삶과의 전쟁이고 생존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가올 내일이 노력하면 좋아지고 희망이 보이는 삶이 아니라 지배계층에게 이용당하고 항상 패배하는 생활의 연속입니다.

영수의 가족은 대대로 지어오고 살아오면서 손때가 묻은 집에 철거계고장을 받게 됩니다. 이유는 영수의 가족이 살고있는 행복동 일대를 재개발하고 주택개발사업을 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계고장에는 3주 가량의 시간 안에 자신철거 명령이란 내용도 담고 있었습니다. 철거 계고장을 받은 어머니는 무허가 건물 표시가 되이 있는 알루미늄 표찰을 따로 떼어 보관합니다. 이 표찰이 나중에 이 건물을 거래할 수 있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사무소에 동네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지만, 표찰을 증거로 한 집의 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영수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의 주장이 받아들지지 않자 동사무소 옆에 있는 공고문을 읽습니다. 공고문에는 철거하고 들어설 아파트의 값이 적혀 있는데, 원주민들의 소득으로는 감당이 안되게 터무니없는 높은 가격에 입주가격이 적혀있고, 만약에 입주권을 포기하면 어느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물론 입주를 포기하는 금액도 말도 안되게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영수는 예전에 정치인들이 이곳에 와서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준다는 유세를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많은 행복동 주민들이 주민들의 필요에 의한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그들이 필요로한 정치놀음에 놀아난 셈입니다.
더구나 영수의 집에는 전세를 들어온 가족도 있었는데, 당장에 전세금까지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상황이 난처하게 되었지만, 다행이 이웃집 명희네가 전세금을 빌려줍니다. 그런데 명희네가 빌려준 돈에도 안타까운 사연이 있습니다. 이 돈은 명희가 죽을 때 남긴 통장의 돈입니다. 명희는 영수와도 사귀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영수나 명희나 항상 먹을 게 부족했고 그래서 잘 먹지 못해 체구가 작았습니다. 명희는 어려운 살림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다방 종업원, 고속버스 안내양, 골프장 캐디 같은 직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명희는 집에 올때마다 배가 불러왔습니다. 눈군가에게 몹쓸짓을 당한 것입니다.
영수는 이런 지옥같은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영수의 희망사항일뿐 중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벌이가 좋지 않았고 정신도 온전치 못했으며 많이 늙어서 지금까지 해오던 수도배관이나 잡일로 가정생활을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김불이는 어느날 그의 꿈인 달나라로 향합니다. 김불이의 살아 있을 때 꿈이 달나라에 가는 것이었지만, 희망이 없는 고된 삶의 무게 앞에 스스로 공장 굴뜩에 올라가서 몸을 던져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그렇게 영수의 아버지는 평생 고통뿐인 삶을 스스로 끝내게 됩니다.
한편 영호는 형인 영수에 비해 공부보다는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불합리에 바로바로 대응을 하는 성격입니다. 같은 공장에서 근무했음에도 두 형제는 철저하게 격리되어서 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호는 부당한 대우에 반발하다가 쫓겨나기 일수였습니다. 공장안에서는 노동자들끼리 모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형제들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끼리도 같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10분 뿐인 점심시간, 그리고 이어지는 떨어져서 20분 공차기를 끝내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영호를 비롯한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는 것, 쉴 수 있는 시간, 인간적인 대우를 바랐지만, 사용자측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할 뿐 나아지는 게 없었습니다. 형인 영수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심이 많아 항상 영호한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 영수는 책을 많이 읽어서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지식도 많았습니다.
동생 영호는 집을 사려는 사람과 흥정을 합니다. 왜냐하면 될 수 있으면 집을 가급적 비싸게 팔아야 하니까요. 시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살 곳을 구하기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적어도 25만원은 받아야한다고 흥정을 합니다. 그돈으로 명희네한테 빌린 돈도 갚아야 하고 새 삶을 시작할 집을 마련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영호는 아버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웃집에서 과외선생으로 오는 명문대 중퇴생 지섭이라는 사람과 자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지섭은 잘 통하는 것 같았지만, 영호가 듣기에는 자신들과 맞지 않는 대기권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럴때마다 "너는 학교에서 죽은 교육을 받았다. 형처럼 책을 읽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영호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영호집은 행복동 철거촌에 검은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하고 25만원에 거래를 합니다. 검은 승용차를 타고 온 사람은 부동산개발업자인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행복동의 집을 철거하기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영희가 사라집니다. 영희를 찾아 가족들 모두 이사를 해야하지만 영희는 보이지 않습니다. 철거를 빨리 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폭력적인 강제 철거반원들이 들이 닥치면서 철거가 시작됩니다. 그 과정에서 지섭이 나서게 되고 지섭은 이마에 피를 흘리며 다치게 됩니다. 이에 항의 하기위해 동네 사람들이 동사무소에 몰려가지만 영호는 피곤함에 지쳐 잠을 자게 됩니다.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되는데 꿈속에서 영희를 보게 됩니다. 그 꿈속에서 영희가 폐수 속으로 팬지꽃 두 송이를 던지는 꿈을 꿉니다.

영희는 난장이의 딸이라고 미끼지 않을만큼 아름답고 고운 소녀입니다. 열 일곱 살이이었고 기타치기를 좋아하는 가난하지만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영희는 영희의 집의 표찰을 산 검은 승용차를 탄 사람의 차에 타고 가족들과 사라집니다. 검은 승용차를 탄 사람은 큰 부동산 업체를 운영하였는데, 사실상의 사업주는 그의 아버지였고 그는 부동산 관련 업무를 처리하며 일을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영희가 그를 볼때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태부터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았고 다양한 선택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장하면서 더욱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갖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영희는 그에게 몸을 맡기고 참을성 있게 기다립니다. 긴 시간을 같이 하며 그의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알루미늄 표찰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영희 집의 표찰을 맨 아래에 보관합니다. 나중에 영희가 영희집의 표찰을 찾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희는 남자가 잠든 사이에 정신을 잃게 만드는 약을 묻힌 손수건을 그의 코에 대고 깊은 잠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집의 표찰을 가지고 집에 돌아옵니다. 이어서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 표찰과 계고장, 돈을 가지고 사무소에 들러 관련된 일을 처리합니다. 드디어 영희의 집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영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영희는 눈물을 쏟아내며 말합니다.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말하는 악당은 죽여버려”라고 악에 받쳐 말합니다.

소설의 말미에 영수의 가족들은 폐수와 공장 연기로 가득한 은강시 만석동(필자가 보기에는 인천으로 추정 됨)이라는 도시에 이주를 합니다. 그곳에서 영수, 영호, 영희는 이런 저런 공장에서 일하게 되고 사업주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면서 노조를 만들어 회사에 맞서게 됩니다. 맏이인 영수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업주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게 구타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부당함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업주들은 갖은 방법으로 노조를 탄압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합니다. 결국 영수는 사업주를 살해하겠다고 본사를 찾아가 자신의 의지를 들어내 실행을 합니다. 영수는 사업주로 오인한 사업주의 동생을 살해합니다. 그로인해 영수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소설은 끝이 납니다.


감상평

소설의 서두에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학교사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고 두 개의 답을 제시합니다.
질문: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1: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기 얼굴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깨끗한 얼굴을 한 아이는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답2: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다 ‘뫼비우스의 띠’라고 썻다.
제군이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주기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범한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보자.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수학선생님의 뫼비우스의 띠와 굴뚝을 청소한 두 아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닮아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에 두 가지 답변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뫼비우스의 띠도 보통 안과 겉이 뚜렷하게 구분이 가능하지만 뫼비우스의 띠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는 난장이로 불리우는 극빈층과 소외계층으로 구분되는 피지배계층과 사용자와 사회적 기득권층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이분법적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것은 두 계층이 어쩌면 공존하기 힘든 이야기일 수 있는데, 같은 하늘아래서 같은 시간에 두 계층이 존재하면서 충돌하고 있습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난장이들의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결국에 희망을 쫓아 부당함에 사용자들을 대변하는 거인들에게 저항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희망은 좌절되면서 이야기가 끝을 맺게 됩니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부터 노동자 계급과 사용자들의 갈등은 있어왔고, 산업화 시대에 우리나라도 같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1970년대 최초로 연재가 된 뒤, 지금까지도 읽혀지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봤습니다. 그 이유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상황은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시대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난장이가 생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계급적 차별과 세대 갈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도 문제가 되고있는 비정규직문제와 ‘열정 페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기성세대들이 성장하는 세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부분은 필자가 보기에도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생활여건이 개선되면서 밝은 면이 밝게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에반해 깊은 어둠의 그림자도 사회 한켠에 자리잡고 동반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어느 계층을 떠나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사실 계층이란 말도 이 책을 읽고 이 글에서 쓰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사람의 이기심과 탐욕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는 하지만, 서로의 존재가 없을 때는 자신의 부와 명예도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어느 한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듯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한 세상 살고 보면 짧기 그지 없고 공수래공수거일뿐임을 절감하듯이 모두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음을 소중히 여기고, 아픔과 고통을 나눌 줄 알며 우리 주위의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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