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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책, 공정하다는 착각(전체 감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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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능력주의’, ‘엘리트 주의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수십년의 민주주의 사회 속에 살면서 커져만 가는 불평등과 양극화는 어떻게 커져왔고, 이에 대한 결론과 해결책에 대해 쓴 책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능력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사회적인 성공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의 댓가로 생각하고, 반대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했거나 그대로 자신의 자책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 문제인지 세계적인 석학 마이클 샌델 교수님이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를 예시로 하고 있는 책이지만, 선진국으로 향하는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도 같이 생각해보면 좋은 내용입니다.

글이 긴만큼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굵은 글만 읽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 보세요.

책 내용살펴보기

 

  돈은 뒷문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서도 떠돈다. 실력대로라고?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하며, 따라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SAT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31p)

  한 마디로 말해서 집안의 경제력이 좋은 대학에 입학할 확률이 더 높다는 이야기 입니다. 경제력이 좋은 집안은 아무래도 사교육이나 대학입시에 필요한 좋은 교육을 받을 확률이 더 높아지겠지요.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집안의 경제력이 꼭 SAT같은 성적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학업 성적이 아닌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경제력이 좋은 집안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소위 뒤문 입학이 많아지는 게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경제력이 좋은 부모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가 명문대 간판을 달도록 함으로써 그들은 능력주의 광채를 두르려고 한 것 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던 것이다. 그들이 단지 부를 물려줄 마음뿐이었다면 신탁 기금을 포함한 재물을 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뭔가 다른 것을 원했다. 명문대 간판이 줄 수 없는 능력의 지표말이다.(36p)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예전에 들려오던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이 없어진 것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더 큰 문제라면 집안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입학한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명문대 입학이라는 성취를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됐든 경제력이 있는 부모가 사회적인 능력을 갖추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뒷받침 해줬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학생이 사회에 진출하고 영향력있는 기득권층이 된다면 비엘리트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겸손은 생각할 수도 없겠지요.

 

  따라서 샌델 교수는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환경을 넘어서는 길을 찾으려면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능력주의의 의미는 지난 수십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직업의 귀천이 없음을 무너뜨리고, 많은 이들이 엘리트는 교만하다고 달라지지 않았던가? 세계화의 승리자들이 자신들은 얻을만한 걸 얻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 하도록 그리고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지도록 바뀌지 않았던가?

  엘리트층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를 위험 수준까지 밀어내게 될 때, 능력에 대한 의문은 특별히 중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38p)

 

  안타깝게도 샌덴 교수는 이러한 흐름이 결코 긍정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필자도 미국과 비슷한 능력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대부분 공감되는 부분들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다. 이러한 위기는 외국인 혐오증이 점점 심해지고, 민주주의 규범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인물들에 대한 지지 역시 높아지는데서 느낄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그 자체로 문제가 많다. 그 못지않게 심각한 사실은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전 세계에서 정치를 들끓게 만들고 있는 불만에 대해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41p)

  학자의 눈에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에 더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싶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세심하게 능력주의 사회가 주는 부작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 또한 아무리 도덕적이고 공정한 정책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우정치 정당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져가고 대중은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첫 번째 진단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고 있다. 두 번째 진단은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빠른데 대한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라 본다. 새 경쟁질서에서 평생직업이라는 개념은 끝났고 혁신, 유연성, 경영자 마인드, 신기술을 평생 학습하려는 의지 등이 중요해졌다.(43p)

  이러한 문제가 최근 수십년 동안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으로 꾸준히 낮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조류 탓만이 아닙니다. 주류 정당들과 집권 엘리트가 그렇게 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정치인)은 바로 자신들이 자아낸 분노가 포퓰리즘의 불을 댕겼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소란이 역사적으로 유지해온 균형을 깨뜨린 정치적 실패에서 빚어졌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44p)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싶습니다. 한 개인의 엘리트가 정치적 이해관계와 당리당략에만 모아져 있지 정작 그 속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를 파악하지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샌델 교수도 자연스럽게 최근 40여년간의 정치적 흐름을 보고 있습니다.

 

  최근 수십년 동안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 시킨 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명문대학들은 한때 특권층 자녀들의 입학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종, 종교, , 민족 등의 장벽등을 무너뜨렸다.(48p)

  그 증거로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삼분의 이는 소득 상위 5부위 가정 출신이라고 합니다. 장학금과 기타 지원책이 후하지만, 아이비리그 대학생 가운데 하위 5분위 출신자는 4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력과 재능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고착화 되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습니다. 사다리 자체가 일반 대중에게는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 윤리

 

  ‘공정한 능력주의 제도를 마련하자’, ‘사회적 위치가 재능과 노력을 반영하게 하자며 되풀이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성공(또는 실패)을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 재능과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라고 생각하는 건, 승자들이 승리를 오직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라고 여기게끔 한다. 그보다 운이 나빴던 사람들을 깔보도록 한다.(51p)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됩니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합니다. 또한 우리를 공동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킵니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킵니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됩니다.

 

 

 

굴욕의 정치

 

  아래쪽에서 올려다 볼 때, 엘리트의 오만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53p)

  자신의 곤경은 자신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 넣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모욕감을 줍니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합니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입니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게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정와 다릅니다. 이런 점에서 굴욕의 정치는 부정의 정치와 다릅니다.

 

 

 

왜 능력이 중요한가

 

  오직 각자의 능력대로만 보상하는 시스템은 공정성을 갖는다. 오로지 실제 성취만으로 사람들이 구별될 뿐,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차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위주로 보상하는 사회는 또한 양망이라는 차원에서도 매력적이다. 효율성을 늘리고 차별을 재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는 우리 운명이 우리 손안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성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우리하기 나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우리는 상황의 희생자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주인이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높이 오르고 꿈을 이룰 수 있즌 존재다.(66p)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 원칙은 폭압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그 원칙에 따르지 못할 때뿐만 아니라, 따를 때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결과라는 말조차 무한 책임론에 일정한 한계를 도덕적으로 부과합니다. ‘주어진 결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운명이나, 우연이나,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넘어서 행운 또는 은총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이로써 우리는 소득과 직업은 능력 문제가 아니라 신의 은총 문제라는 옛 논쟁을 떠올립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스스로 얻는 것들인가 받는 것들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1990년대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갈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능력주의적 신념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107)

  안타까운 현상이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러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에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도 않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과거 미국 노동계나 진보층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에서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책임에 대해 거론해왔고, 전형적으로는 시민 개인이 그 나라와 동료 시민들에게 갖는 책임을 들먹였다. 그러나 야스차 뭉크의 지적처럼 이제 책임이란 우리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지, 그렇게 못할 경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복지국가는 이제 책임을 면해줄 방파제로서 충분하지 않으며 전부다 더욱 개인에게 책임을 물리고 있다. 잘못된 행동이 아닌, 운이 나쁜 탓에 곤경에 놓인 사람에게만 복지 수혜 자격을 제한하는 조치가 대표적인 각자 능력대로 대접하려는시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116p)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지도자는 많은 이해관계에 있어 공정성이나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함에도 성공이나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바마의 사회적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져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데 엮인다.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이 일궈낸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116p)

  이 글을 쓴 필자가 보기에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글입니다. 미국의 정치인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도 선거때만 되면 기회는 공평하고 결과는 투명하다라는 말로 선거에 자주 씁니다. 하지만 결과는 기득권 정당이라고 하는 우파 정당과 크게 달라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청년세대 또는 기존 진보정당 지지자들이었던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기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의 반격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그해 초 영국에서 예상을 깨고 이루어진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긴 노동자들을 외부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123p)

  샌델 교수는 이런한 능력주의와 엘리트들의 자기 세계화그들만의 가치관을 폭정이라는 다소 격한 표현을 쓰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와 폭정은 사회적 상승의 담론 그 이상의 것들에서 비롯된다. 이는 여러 가지의 태도와 상황을 포괄한다. 그런 많은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능력주의를 유쾌하게 만든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세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의 뒤처진 사람들의 사기를 꺾는다. 두번 째, 대학 학위가 그럴듯한 일자리를 얻고 품격있는 삶을 살기 위한 기본 조건이라는 주장을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트린다. 셋 째,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 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125p)

  ‘하면 된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일과 자기 구제에 대한 이런 입장은 연대와 시민의 상호적 책임에 대한 입장에도 영향을 줍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공하리라 믿어도 되고, 실패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게 옳다면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혹독한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는 것과 믿는 것

 

  능력주의가 나아갈 이상에 대한 야심을 나타내면, 패배자는 시스템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주어진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패배자는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요구받게 된다. 최근 이러한 요구는 뭐 하다가 대학 학위도 못 받았느냐의 형태를 가장 많이 띤다. 능력주의적 오만의 가장 고약한 측면은 학력주의에서 찾을 수 없다.(132p)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가 학력이 무기가 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144p)

  최근 수십년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합니다.

 

 

 

최고의 인재들

 

  샌델 교수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대통령으로 오바마를 꼽고 있습니다. 오바마 이후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간 클린턴도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바마는 언젠가부터 최고 지위의 전문직업인들은 공정한 선발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 선별 과정이라는 게 그와 그의 부인 미셸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도록 해준 과정이기도 하기에 이는 곧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높은 지위를 정당화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고급학력에 대한 선호는 오바마 임기내내 이어졌다. 두번 째 임기 중반 무렵, 그의 내각 구성원 중 삼분의 이는 아이비리그 출신이었다. 21명 중 13명은 하버드 또는 예일 졸업자였으며 대학원 학위가 없는 사람은 세 명 뿐이었다.(152p)

  이런 정치적 판단착오(학력주의 잘못된 사례)는 능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프랭크는 이를 두고 민주당 사람들과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던 거대한 능력주의적 특권, 그것은 명문대학의 학위와 직결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153p)

  월스트리트 간부들이 오바마 선거운동에 거액의 기부를 했음은 사실이지만, 그의 행정부가 금융업계에 관대하게 대한 것은 단지 정치적 보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더 심층적이고 능력주의적인 풀이가 있는데, 그것은 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 학력이 뛰어나고 전문성이 돋보이는 투자은행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받는 엄청난 보수가 아깝지 않은 인재들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는게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능력주의를 위한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자신의 정책이 우둔하지 않고 스마트하다며 일은 자신의 학력이 출중하다며 변명하는 일과 매우 닮았다. 국무장관에 막 임명되었을 때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부장관들 몇몇을 선임하며 이런 연관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의회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저는 스마트 파워의 활용에 대해 말했습니다. 스마트 파워의 핵심은 스마트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유능한 분들은 제가 아는 가장 스마트한 분들 중에 속해 있습니다.”(157p)

  오바마도 이런식으로 겉보기에는 초당파적이며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과 발언 방식에 기댔습니다. 인종, 민족, 성 평등과 관련된 쟁점들에서 오바마는 유창하게 진짜배기의 도덕적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나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으로 넘어가면 마치 본능인 것처럼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비이념적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글에서 눈여결 볼 것은 스마트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사고방식이 마치 진리인양 말하고 있지만 은연중에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오만이 섞여있다는 것입니다.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엘리트는 그들의 스마트한 정책에 대해 그 당파성을 모를 뿐 아니라, 입이 닳도록 스마트하다”, “우둔하다를 말함으로써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도 까맣게 모르는 것 같다. 2016년 많은 노동자들을 교육을 잘 받은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느낌에 분노를 품었다.(159p)

  실제로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잘한다는 그들만의 가치관은 200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비대졸자 시민은 단지 업신여겨질뿐이 아니라 선출공직에 전혀 참여할 수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소수의 대졸자가 다수의 비대졸자를 통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국 성인의 삼분의 이가 비대졸자지만 그 가운데 연방의회에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손을 꼽을 정도입니다. 보다 학력이 낮은 사회 구성원들은 서유럽 전체적으로 의회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미국, 영국과 비슷한 패턴입니다. 독일, 프랑스, 네델란드, 벨기에에서 대의정부는 고학력자들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이처럼 부유한 나라들에서조차 성인의 70퍼센트 가량은 배대졸자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국회에 들어간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료 합니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습니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의회를 고학력자 계층의 전유물로 만들면 정부가 더 효과적인 방향으로 가기 힘들다. 대표성만 더 낮아질 뿐이다. 이로써 노동계급은 주류 정당에서 배제되며 특히 중도좌파 정당에서 그렇게 된다. 그에따라 정치판은 학력에 따라 양극화된다. 오늘날 정치판을 가르는 가장 깊은 균열중 하나가 바로 대졸자와 비대졸자 사이의 균열이다.(167p)

  그럼으로써 나타난 게 2016년 비대졸자 백인의 삼분의 이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고 합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 고학력자 표의 70퍼센트가 몰렸습니다. 당시 선거분석학자들은 소득보다 학력이 트럼프 지지 여부에 더 확실한 변수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비슷한 소득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학력이 높은 사람은 힐러리 클린턴에게, 낮은 사람은 트럼프레게 투표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미국의 대선투표에 관심이 많아서 예의 주시하고 봤을텐데요. 많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힐러리쪽으로 당선 가능성을 높게 봤을 것입니다. 필자 또한 그러리라 생각되었지만, 결과를 보고서는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이제야 어느정도 미국인들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정당에 대한 지지성향은 단지 미국만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좌파 정당들은 저학력자의 지지를 얻고 우파 정당들은 고학력자의 지지를 얻어왔습니다. 능력주의 시대에 이 패턴은 뒤집혔습니다. 오늘날 고학력자들은 중도좌파 정당에 투표하며 저학력자들은 우파 정당에 투표를 합니다. 이러한 패턴 역전은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에서 놀랄만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현대를 사는 우리 특유의 문제 중하나는 일부 능력주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중요성에 취한 나머지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잊은 것이다. 일부 능력주의자들의 경우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조롱하곤 한다.(194p)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인식하면 이러한 자수성가의 그림이 복잡해집니다. 그것은 편견과 특권을 극복하는 것만으로 정의로운 사화를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능력주의 신념에 회의를 가져옵니다. 우리 재능과 천분이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라면(유전이든, 우연의 결과든, 신의 선물이든), 우리가 거기서 비롯된 혜택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하는 것은 실수이자 자만일 것입니다.

 

 

성공에 대한 태도

 

  어떤 능력과 업적이 찬양받을만한가를 정하는 건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가치관이며, 그것은 좋음의 영역이지 옳음의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231p)

  오늘날 집권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은 대체로 자신들이 전문 직업인들에게서 비대졸자라며 업신여겨졌다고 믿은 노동자들의 분노에 힘입은 것이다. 좋음보다 옳음이 먼저라는 주장은 사회적 명망을 개인 도덕의 문제로 돌렸으며,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이 오만과 굴욕의 정치에 깜깜하게끔 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력에 대해 널리 퍼진 의식, 전문직업인들이 블루컬러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태도 등을 사회규범과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면 잘못이다. 명예와 인정의 문제는 분배적 정의와 결코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특히 불우한 사람들에 대해 보상할 때 내가 너희를 후원해 준다식의 자세가 은연 중 깔려 있을 경우 더욱 그렇다.(232p)

  “스마트한 사람과 우둔한 사람이라는 문구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의 최악의 의심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가 함께 운명을 나눠야 한다고 본 롤스의 민주적 감각과는 한참 동떨어진 채 네이글이 쓴 그 문구는 일부 복지국가 자유주의가 빠지기 쉬운 능력주의적 오만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능력주의의 등장

 

  ‘능력주의라는 말은 본래 비하의 의미를 갖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찬양과 갈망의 용어가 되어버렸다.(240p)

  지난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 언어는 공적 담론을 지배했지만 그 악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았다. 심지어 불평등의 심화를 눈앞에 보면서도 말이다.(242p)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 수 있으리라.” 능력주의 엘리트는 이 주문을 외우는데 바빠서 그것이 효력이 없는 주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세계화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한 사람들의 높아져 가는 분노에 귀를 막은 채, 그들은 불만이 꽉 찬 공기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녔습니다. 포퓰리즘의 반격은 그들에게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내놓은 능력주의 사회시스템에 내재된 대중을 향한 모욕을 도무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신들의 성공에 취해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기득권에 취해 비엘리트 계층을 자신도 모르게 바하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대졸자 특히 명문대 졸업자는 고소득 직업을 갖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사회적 상승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미 입학때부터 상류층 소속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부분의 사람이 최상층에서 올라타는 엘리베이터와 같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266p)

  미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는 현상이 아닌가싶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너무 많은 대학진학이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부유한 집안이나 기득권층에서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문제들이 대대로 대물림 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샌델 교수는 이러한 대학들의 불공정함을 여러가지 벙법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계층을 기반으로 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취해 빈곤가정 출신 학생에게 현재 대학들이 동문자녀, 기부금 입학자, 체육특기생들에게 주고 있는 혜택을 주면된다. 아니면 그런 우대정책 전체를 없애서 현재 부유한 집 자녀들이 받은 특혜를 줄일 수도 있다. 또한 사교육의 힘으로 SAT 점수에서 유리한 입장인 부유한 집 자녀들에 대응해 더 이상 그런 시험을 입시요강에 넣지 않음으로써 더 공정하게 할 수도 있다.(269p)

  학자로서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고착화되어 있는 능력주의 시스템에서 상류층이나 빈곤층 모두에게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기는 하겠지만, 먼저 정책 시행자들에게 고착화된 사회 시스템을 알리고 서로가 공감을 하고 개선되어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래도 문제는 내로남불식의 도덕관념이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한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만과 굴욕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286)

  이에 적절한 대답은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최고 명문대들의 경쟁적 입시를 완화시킴으로써 능력주의적 인재선별기의 전원을 뽑아 버려야 한다.’ 보다 넓게는 4년제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293)

  아무리 야심찬 주장이라고 해도 4년제 대학 학위가 성공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능력주의자들의 주장을 우리 다수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헷갈리도록 합니다. 그러한 헷갈림은 우리 경제만 멍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계급니 하는 유형의 일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도록합니다.

  인재 선별기가 끼친 폐해를 바로 잡으려면 직업 훈련에 예산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 이상이 필요합니다. 이를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명품 브랜드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지역사회 대학이나 기술 및 직업훈련학교 등록자들의 명예는 별로 쳐주지 않는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배관공이나 전기기술자, 치과위생사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SAT점수가 낮은 사람이나 아이비리그 대학에 갈만한 재력이 없는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과정으로 여길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일의 존엄성 하락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 점수를 잘 따내고 대입 시험에서 학력이 없는 사람들은 시궁창에 빠뜨립니다.

  미국 노동계급의 마음의 상처로 빚어진 현상은 구직 포기뿐만이 아니다. 다수가 삶 자체를 포기한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310p)

  절망 끝의 죽음은 이런 차이의 대부분을 뒷받침한다. 저학력자는 오랫동안 대졸자에 비해 알코올, 약물, 자살로 죽을 위험이 높았다. 그러니 죽음에 있어서 학력간 균열은 최근에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끝의 죽음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배나 많았다.(312)

  절망 끝의 죽음이란 저학력 노동자들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 상실을 나타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능력을 지나치게 따지는 사회에서는 많은 재능을 무가치하게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층계급이 이렇게 취약해진 저은 없다고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절망 끝의 죽음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선거분석을 해본 결과 소득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도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대졸 비율이 높은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우리의 소비자 정체성과 생산자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 프로젝트는 그리고 소비자 복지 우선주의는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를 금전적 의미로만 풀이하는 방식이 가져오는 악영향에 눈을 감는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그것이 초래할 불평등을 제대로 인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일의 존엄성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지 못했다.(322p)

  이 상처를 인식하고 일의 존엄성을 복구해 줄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정치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만 합니다. 이 분노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서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에 따라 인정을 받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입니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생활을 황량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우애, 공동체, 공동의 애국심 등 우리 문명의 이런 중대한 가치들은 단지 함께 물건을 사고 소비한다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그런 가치들은 수준있는 급여를 받으며 존경받는 직업 생활을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그런 직업은 개인이 그 지역사회에, 그의 가정에, 그의 나라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업입니다. ‘나는 이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있어요. 나는 이 위대한 공적 모험의 참여자예요.’라고”

  또한 이와 같은 공감대를 모든 국가 구성원이 얻기 위해서는 일의 존엄성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논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법을 세우는 것이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330p)

 

 

 

결론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은 아닙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의 영웅적인 성공사례에 고무되어 다른 이들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습니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집니다. 또다른 대안이 있습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개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 하는 것 들로 이루어집니다.

 

  이 책에 소개된 영국의 경제사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토니는 기회의 평등이란 기껏해야 부분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공할 기회는 거시적으로 본 실질적 평등을 대체할 수 없다. 소득과 사회적 조건의 극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릴 수도 없다.”

  토니의 말을 전하며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두가 마지막 글과 같이 수준있는 공동체의식과 존중의 문화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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