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결혼을 하면 예외없이 두 분의 어머님과 아버님을 모시게 됩니다. 나를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과 배우자의 부모님들이지요. 결혼을 하면서 성장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는 만큼, 살아가면서 보게 되는 양가의 부모님을 모시게 되는데요. 자식으로서 연로하신 두 분의 아버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두 분의 노년의 생활이 너무 대조적이고 상반되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봤습니다.
시골의 친가 아버지
필자는 어릴 적 장남으로서 집안의 운명을 책임질 사람으로 길러졌습니다. 그 때는 그게 당연한 저의 운명으로 알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친가의 한 세대 윗분들은 저를 대하면서 대화를 할 때, 한 가지 전제를 했습니다. "너는 장남이니까"라고요. 무슨 말을 하든지 우선 이 말을 꺼내놓고 시작했습니다. 다시말해 집안의 많은 대소사와 대를 잇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열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고 이 말이 나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확히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부터요.
어머니가 세상이 떠나고 아버지는 달라졌습니다. 제가 그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것들이 집안을 위한 어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제 자신의 것으로 돌려졌습니다. 마치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 토끼를 잡더니 필요없어진 개를 잡아먹었다는 고사처럼 '토사구팽'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유교적 가치관에 익숙한 도덕적 윤리관과 너는 너의 인생을 니가 책임지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생각 사이에서 십년을 넘게 정신적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권력은 정치적 관계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가족 안에서도, 직장안에서도, 종교적 관계 안에서도, 적게는 두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형성된다는 것을요. 대표적으로 모드 쥘리앵의 자서전 <완벽한 아이>를 보면서 필자와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드 쥘리앵은 자신의 친아버지를 '식인귀'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란 뜻이지요. 유교적 도덕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불효자와 다를바 없지만 오죽하면 자신의 아버지를 식인귀로까지 이야기했을까요.
경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희 집안도 모드 쥘리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어머니한테 많은 것을 강요하고 희생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별 것 아닐 것 같은 반찬 투정도 마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화를 내고, 툭 하면 고함소리로 어머니를 주눅들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니까 당시 같이 생활을 하던 삼촌이나 고모도 아버지처럼 행동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머니는 시집온 사람이 아니라 마치 하녀나 노예같았습니다. 너무 어렸던 필자는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고, 어머니를 방어해줄 능력도 없었습니다. 마치 그런 상황이 집안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곳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어머니는 가출을 할까도 심각하게 고민한 것을 채 열 살이 되기 전 필자의 기억에도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필자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화가 나가지고 집에와서 어머니한테 무시무시한 호통으로 화풀이를 해서 어머니는 내장이 떨릴 지경이라며 못살겠다고요. 이런 게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한 필자는 두 분의 이혼까지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어찌어찌 견디어 나갔지만, 그게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이유 중 한 가지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집안의 대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형제들이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나 화살은 어머니와 장남인 저한테로 향했습니다.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객지 생활을 하던 필자의 형제가 큰 빚을 져서 가족 모두가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자신이 없거나 해결하기 힘든 일은 매번 자신의 형제나 장남인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 일을 해결한다고 나선 작은 아버지는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 자신도 화가 난 나머지 아버지와 대면을 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필자인 저와 사건 당자자인 동생을 가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나서야 할 자리에 작은아버지가 나서고, 작은 아버지와 아버지가 대화를 해야 할 자리에 필자인 제가 가게 된 것이지요. 작은 아버지 자신도 조카문제 때문에 힘들었겠지만, 정말이지 저는 그자리에서 평생 잊지 못할 망언과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죽고싶었습니다. 이 분이 진정 가족이 맞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내 형제지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 대신 왜 내가 쓰레기같은 욕을 내가 먹어야 하는지를......
시간이 가도 아버지의 가부장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더라도 자신을 위한 자식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가족 안에서 직접 권력을 행사할 어머니가 사라지나까 그 타켓은 장남인 저한테로 돌아왔습니다. 지난날 "너는 장남이니까"라는 말로 정신적인 우물 안에 가두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그 장남의 희생은 오로지 "과거의 일들은 너만의 선택일뿐이었다"는 것으로 돌아왔습니다. 필자는 더 이상 안되겠다싶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많은 고민끝에 선을 긋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가족 안에서 책임만 강요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족 안에서 '장남'만 존재하고 개체인 '나 자신'은 이 집안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 '나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릴 적 필자한테 '장남'의 책임을 이야기하는 아버지와 그 형제들은 집안일에 신경쓰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분들은 저한테 아무생각없이 저를 '장남'이라는 정신적 감옥에 갇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이제 모두 자신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듯이 회피를 하고요.
엇그제, 동생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전화였습니다. 보통의 자식들이라면 놀라고 당황해 하는 게 당연하지만, 저는 담담했습니다. 그냥 올 것이 왔구나 정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집안의 아버지이니 듣고도 모른척 할 수 없어서 어제 군산에 내려와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막상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본심은 변하지 않아보였습니다. 병세는 심각해보이기는 했지만 말씀 자체를 들어보고 생각해보면, 병상에서조차 권력을 행사하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한번 실망했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 자리에서도 자식들을 저울질하고 비교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지심이 들던 마음을 사라져버리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손이나 자식들을 생각하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자식으로서 그나마 남은 인정을 가지고 찾아갔지만,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처가 아버님(장인어른)
장인어른은 전쟁 때 황해도에서 남하 한 실향민이십니다.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 대부분이 그랬든 강력한 생활력으로 군산에서 자리를 잡고, 세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분입니다. 친아버지와는 달리 마음의 여유가 있으시고, 노년도 자녀들한테 맡기고 유유자적하시는 분입니다. 전후세대가 다들 그렇겠지만, 그 힘든 풍파를 겪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여유를 가지셨는지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매 순간 전투적인 친가 아버지와는 반대의 모습입니다.
은퇴 전에는 몇 가지 사업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형제들과 자식들이 원하는 만큼 교육도 시켜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업 중에도 등산을 좋아하셔서 국내에 안다녀 본 산이 없을 정도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연로하셔서 산에는 못가고 매일을 화초를 가꾸면서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계십니다.
친가 아버지 병원에 다녀와서 인사차 처가집에 들렀습니다. 창가 소파에 우둑커니 앉아 밖을 내다 보던 장인 어른은 "날씨가 너무 화창하고 따뜻해서 밖에 나가봐야겠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황사가 심하긴 했지만 시내 아파트 단지에서는 황사보다는 따스한 햇살이 더 부드럽게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장모님과 함께 아파트 근처에 있는 여미당 정원에 나가셔서 봄 햇볕도 쐬이고 차도 한 잔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장모님은 장을 보고와서 찬거리 손질을 해야 돼서 못나가신다고 해서 장인 어른만 모시고 나갔습니다.
여미랑에는 벗꽃이 지기는 했지만 이제 피어 올라오는 철쭉과 막 피어올라 향기를 내뿜는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여리랑 한 켠 고우당에 차를 주문해 마시면서 여미랑 정원을 찬찬히 살펴보던 장인어른이 말씀을 하십니다.
"나이를 먹고 거동하기가 불편하니까 젊을 때 부지런히 더 여행을 다녀보지 못한 게 아쉽네!"
"이런 예쁜 정원을 보니, 내가 비를 내릴 수만 있다면 비를 살짝 뿌려 놓고 비가 그치고 정원을 보면 더 예쁘겠네!"
누구나 멋진 풍경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연로하신 분이 이런 풍경을 보고 이런 감상적이고 여유있는 말씀을 하신다는 것에 새삼 놀랍습니다. 시인만이 내면의 깊은 감성을 표현하는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육체는 늙었지만 감성만은 젊은 사람못지 않은 장인어른이십니다. 연못 앞에서 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요?
어떤 작가는 젊어도 늙은 사람의 정신을 갖고 있는 반면, 나이를 먹어서도 정신만은 젊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차이는 평소의 건전한 생활습관과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자신의 환경에 열악하고 극단적으로 좋지 않아도 그 속에 작은 희망의 불씨만 있더라도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한 번 사는 인생이지만 주위 사람들한테 존경이나 명예까지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마음 한 켠에 작은 희망과 순수함을 간직하며 사는 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희망의 빛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게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면 주위 사람들과 부정적인 관계를 유지 하는 것보다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지요.
비슷한 세상을 살아온 두 분의 아버지이지만, 작은 생각의 차이가 자식과 주위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친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 아직도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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